잊혀진 원고가 모이는 섬

이수연 에세이 칼럼

by 이수연

중학교 때, 좋아하던 오빠가 기타 치는 사람이 좋다고 해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해 주길 바라서 음악을 시작하다, 라니. 참으로 단순한 이유였다. 그 오빠와는 사귄 지 두 달만에 헤어졌지만, 음악과는 헤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열일곱에는 밴드부에서 기타를 쳤고 스무 살 무렵까지 심심하면 기타를 잡았다.


잊혀진 원고의 섬


한창 기타를 치던 때, 이상하게 늘 잃어버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기타 피크. 기타를 치기 위한 작은 플라스틱 조각인데 지갑에도, 기타 가방에도, 사물함에도 피크를 넣어두었지만 반드시 잃어버렸다. 이 기타 피크의 가출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음악 커뮤니티에는 ‘잃어버린 피크가 모이는 섬’이 있고 기타 피크를 가져가는 요정까지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요정이 피크를 이리저리 주워가 그 섬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피크를 섬으로 보내고 기타리스트가 새로운 피크를 잔뜩 사면 다시 요정이 하나 둘 주워간다고 했다. 이와 비슷한 것이 머리끈이 모이는 섬, 케이블이 모이는 섬 등이 있었다.

잃어버린 피크가 모이는 섬. 참 재밌으면서도 사랑스러운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잊혀진 원고의 섬’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되지 못한 잊혀진 원고들이 모이는 섬인데, 실수로 지워진 원고들 역시 이곳으로 모여 있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곳엔 분명 내가 실수로 날려먹은 원고지 200매 분량의 원고와 아직 출판될 기미도 없는 내 원고가 “날 잊은 거야?”라는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겠지. 으윽. 마음이 아프다. 잊지 않았어. 잊지 않았다고.



island-1149508_1280.jpg 이런 섬에 원고가 가득하지 않을까? 원고의 요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pixabay)


그런데 생각해보면, 모든 원고가 다 책으로 나오는 것은 힘들다. 무엇이든 엮으면 책으로 만들 수야 있겠지만, 분명 스쳐 지나가는 원고도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칼럼이나 서평 역시 책으로 묶기 위해 쓰진 않는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가며 열심히 쓰고는 있는데 ‘책으로 나오지도 않을 걸 왜?’라는 생각도 솔직히 스친다. 오늘 출근길엔 “어휴~하기 싫어~”라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이걸 쓰면서 “돈도 못 버는 일을 왜 하는 걸까~”라는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보다시피 지금도 쓰고 있다. 그래서, 왜. 잊혀진 원고의 섬으로 보낼 것들을 왜 쓰는 걸까.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다시 음악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피크를 수없이 잃어버렸지만, 피크와 함께 연습했던 기억까지 잃어버리진 않았다. 기타를 놓은 지 수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기타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스트로크가 된다. 리듬을 들으면 대충 따라 칠 줄도 안다. 기타를 아예 치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는 자세 또한 떡하니 잡아낸다. 음정이 틀린 것도 들어내고 튜닝도 한다. 만약 피크와 함께 연습한 기억도 ‘사라진 피크의 섬’으로 향했다면, 절대 남아있지 않을 것들이다.

잊혀진 원고의 섬도 마찬가지다. ‘책’이라는 결과물로 나오지 못하더라도 내 안에서 무언가를 계속 변화시킨다. 그것이 ‘퇴고 잘하는 법’이나 ‘설득력 있는 글 쓰는 법’이라던가 ‘꾸준히 쓰는 법’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기타를 연습할 때 실력이 느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없듯, 쓰는 동안에는 뭐가 변화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가끔 잊혀진 원고의 섬의 원고를 들출 때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면, 내가 어딘가 변화하긴 했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언젠가 지금 쓰는 이 글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기도 들고 기분이 좋기도 하다.


잊혀진 원고의 섬에 불필요한 원고는 없다. 비록 실수로 날려먹어 흔적도 안 남은 원고 200 매라 해도 내 안에 저장하는 습관을 남겼다(그렇지만 역시 가슴이 쓰리다). 잊혀진 원고의 섬으로 향한 내 첫 서평도 기세 등등하게 “내 덕분에 너희도 쓴 거라고!”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망한 글이지만, 첫 서평이 있었기에 다른 글을 쓸 수 있었으니까.

지금쯤 아마 수많은 원고가 어울려 수다를 떨고 있겠지. 내 원고는 나를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 새롭게 향할 원고들은 무얼 가지고 섬으로 향하는 걸까. 잊혀진 원고의 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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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수연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다산북스)

* <슬픔은 병일지도 몰라>(반니) 저자

* 독립출판 소설 <자화상>(단편소설집 RED) 제작 및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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