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관리자, 나의 첫 번째 내담자는 나였다"
아버지는 소아마비 장애를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어린 나에게 연민보다 공포로 다가왔다.
술과 담배, 폭력은 아버지의 일상 속 그림자였고, 나는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나는 엄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더 자주 혼이 났다.
더 많이 맞았다. 더 쉽게 울었다.
엄마는 일 년에 한두 번, 마치 예고 없는 폭풍처럼 집에 찾아왔다.
그날은 어김없이 경찰도 함께 왔다.
문을 두드리던 소리, 다급한 발걸음, 깨진 유리컵의 잔해, 그 모든 것이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가족'이라는 단어는 내 사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스무 살이던 큰언니는, 아직 스스로도 다 크지 못했지만 “내가 둘 다 키울게”라는 말을 남기고 두 동생을 책임졌다.
나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아이였다.
친척집에 얹혀 살던 시절, 처음으로 “세상에는 이렇게 따뜻한 음식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고모네 집은 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많아? 나 여기 사니까 행복해.” 그 말은 지금도 내 귓가를 맴돈다.
어쩌면 그건 내 인생 첫 번째 ‘소확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부터 익혔다.
눈물이 나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언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내 슬픔이 누군가의 삶에 더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가난했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왕따를 당해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버티는 게 전부였고, 잘 버티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믿었다.
열여덟 살, 나는 조용히 집을 나왔다. 살기 위해서였다.
청소년 쉼터 문을 두드렸고,
낯선 이불에 몸을 뉘인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 “괜찮아?”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 한마디에 숨이 턱 막혔고,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상담 선생님 앞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늘 괜찮지 않았고,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했던 아이였다는 것을.
스무 살, 자립했고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그 선택이 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졸업 후 종합사회복지관 사례관리팀에서 일하게 됐다.
가족 없이 살아가는 청년, 조현병 어머니 곁에 머무는 소녀, 자립 실패로 고시원에 갇힌 중년…
내가 만난 대상자들의 사연은 모두 다르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눈빛에서 내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그들을 돕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매일 나 자신과도 상담 중이었다.
초기상담기록지를 쓰며 문득, 깨달았다.
“나는 사례관리자이지만, 나의 첫 번째 내담자는 나였다.” 내 안에는 여전히 울고 있는 작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 덕분에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조심스러웠고,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넸다.
내가 들었던 그 말, “괜찮니?”를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전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간호학을 공부하고 있다.
돌봄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마음은 같다.
이제는 몸의 언어를 배우는 중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손, 생명을 살리기 위한 지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존엄을 배워가고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과거를 감추지 않는다.
나는 버틴 사람이 아니다.
살아낸 사람이고, 그 시간 속에서 자란 사람이다.
한 아이의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아이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 아이 덕분에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었고,
다시 사랑할 수 있었고,
무너진 꿈의 조각들을 하나씩 다시 붙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내 이야기를 쓰려 한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냈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에게 속삭이기 위해서.
당신의 아픔도,
삶의 문장이 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