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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지 Apr 22. 2020

떠나는 것, 버티는 것

떠나기 위한 용기, 버티는 것에 대한 응원

5일 뒤에 출발하는 런던행 항공권을 결제했다.




떠나는 것




 오늘 아침에 깰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아니, 집을 나서면서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카페에 왔다. 철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기업 서류 합격 통지가 나에게 기쁘지 않았다. 인적성을 준비하거나 면접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물론 자소서를 쓸 때는 진심을 다해 썼지만, 내년 상반기에는 무조건 취업을 할 것이기에 지금은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싶었다. 오히려 합격하지 못했다면 몰랐을 텐데 기회가 생기니 선택의 기로에 섰고 취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에는 다른 회사에 자소서를 쓰는 것이 순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마감인 자소서를 쓰는 것 대신 항공권을 결제했다.

퇴사하고 세계여행을 계획하면서 중학교 때 친구와 함께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내가 합격하면 여행을 못 가게 될 것이라 처음부터 양해를 구했다. 그때는 오로지 여행 이런 기분으로 여행을 계획하지는 못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제 일찍 잠들어 보지 못한 카톡이 있었다.

혹시 어디 합격하면 알려줘,
그럼 여행 못 가니까 내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행을 떠난다 떠난다고만 하고 제주도를 다녀와서 다시 자소서를 쓰며 며칠을 보냈다. 늘 어떤 선택을 할 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도 내가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자소서를 쓰는 것은 여행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다음 회사에 들어가거나 일을 시작하면 언제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 모든 상황에 감사했다. 서류를 합격시켜 취업에 대한 고민을 해보게 만든 상황, 친구의 카톡,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 모두 다..


여행이라는 것을 처음 시작할 때 전국 여행을 한 달 일정으로 계획했었다. 그래서 그다음 여행도 자연스럽게 한 달이 넘어갔고 소중한 두 친구와 함께 떠난 졸업여행 겸 태국 배낭여행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였다. 여행에 대한 갈망은 끝이 없고, 몇 번의 급 여행을 경험해 보고 그런 여행이 얼마나 매력 있는지 알았다. 약간의 충동만 있으면 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떠날 용기가 생겼다.





충동도 충동이지만 새삼 그런 생각이 든다. 떠나는 것은 조금의 용기만 있으면 되지만 버티는 것, 내 주변의 취준생들과 수많은 사회 초년생들이 하는 것




버티는 것




떠나는 것은 떠남에 대한 갈망과 조금의 용기만 있으면 된다. 정말 어려운 것은 하루하루를 견디고 살아내는 버티는 삶이다. 이번 여행 때문에 이미 잡았던 약속들을 오늘 다 취소하면서 친구들에게 여행 계획을 말했다. 하루하루 버티고 사는 내 친구들, 그 친구들은 당연히 나의 여행을 응원해주었지만 한편 걱정이 되었다. 내가 여행을 떠남으로써 그 친구들이 떠나지 못해 상처받을까 봐. 오지랖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경험해 본 감정이다. 내가 취준을 하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갈 때는 그랬던 것 같다. 막연히 떠나고 싶고, 또 이 현실이 힘들고 버겁고, 그런데 현실은 모든 것을 미뤄두고 떠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퇴사를 결정할 때 지금 이 여행을 결정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많은 에너지를 썼고 지난 2년 하루하루 지내는 것도 그랬다. 물론 일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말 내 삶에서 두 번 다시 안 올 소중한 기회였고, 값진 경험이었고, 또 어떤 학교에서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을 노력과 진심을 대가로 체득했다. 생각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만큼 많이 배웠고, 어쩌면 지금 떠나고 싶게 만든 것 또한 지난 2년이 있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여하튼, 나도 지금 이 결정을 하기 전까지 지난 2년 동안 버티며 살았고, 또 내 주변에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 우리 모두는 그 힘들고 대단한 버티는 삶을 살고 있었다. 새삼 그 당연한 사실이 당연하지 않음을 그리고 충분히 박수받을만한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꼭 다음 여행은 부모님과 함께 떠나고 싶다. 평생을 버티고만 사신 부모님 입장에서 참 철없는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더 멀리 더 높이 내 인생을 바라볼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혹여나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지금 떠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임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갑자기 집에 가서 또 여행을 통보해야만 하는 딸이 될 생각을 하니 깜깜하다. 꼭 약속드려야겠다. 다음 여행은 꼭꼭 엄마랑 아빠랑 함께 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동안 늘 혼자 떠나서 새삼 죄송스럽다.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생각하고 나의 행복을 꿈꾸는 것이 우리 부모님이 독하게 버티셨기에 가능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작가 서랍에서 발견한 2016년 10월에 쓴 글.



+ 이때는 몰랐지만 이 글을 쓰고, 여행을 다녀와서 한 달 뒤에 창업을 했으며 현재 창업 3년차다. 지금은 어느 새 또 버티는 삶을 살고 있다. 퇴사도 창업도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회사의 규모만큼 생기는 창의적인 문제에 매일매일이 고민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바디버든 줄이는 작당모의를 하면서.


문득 브런치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용기내서 3년도 더 된 글의 발행 버튼을 드디어 눌렀다. 이번엔 창업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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