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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지 Jan 25. 2017

새벽 다섯 시 반 트레비 분수

트레비 분수는 늘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었다면

로마를 다녀왔는데, 트레비 분수를 안 가본 온 사람은 없다.

하지만 로마를 다녀왔는데 트레비 분수를 제대로 보고 오기란 쉽지 않다. 


트레비 분수는 콜로세움과 함께 로마의 랜드마크이기도 하고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속설 있어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곳이기 때문이다.



트레비 분수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로마에 도착한 첫날 기대를 잔뜩 안고 갔을 때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트레비 분수를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도착한 트레비 분수는 도착하자마자 나의 기대를 산산이 깨 부서 버렸다. 우선 로마의 어떤 관광지보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이차 있었고 그중 반은 소매치기라고 할 정도로 내 가방을 노리는 집시들이 많아 소지품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더군다나 분수의 주변은 인증샷을 남기기 위한 관광객들로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가까이 가서 분수를 보고 있으면, 뒤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에게 눈초리를 받아 용건이 끝나면(사진을 찍고 나면) 자리를 내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트레비 분수에 대한 기억은 복잡함, 정신없음 그리고 벗어나고 싶은 곳으로 남았다. 오히려 가보기 전에 트레비 분수를 꿈꾸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실망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트레비 분수에서의 기억은 나에게 최고의 기억으로 남았다.

사실 로마에서 몇 년을 사신 유로 자전거 나라의 가이드님이 주신 팁이다. 다 잠든 조용한 새벽에 로마를 걸어보는 것. 그리고 걸어보니 정말 그 시간은 로마의 로마스러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새벽 다섯 시 반의 트레비 분수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분수와 나만 있었다. 해가 뜨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새벽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오직 트레비 분수의 물소리만이 가득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조각은 입체이기 때문에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데, 그 점을 흥미롭게 여긴 때부터 조각에 매력을 느꼈다. 트레비 분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트레비 분수 주변을 뱅글뱅글 돌면서 구석구석 감상하고 뜯어보면서 마음에 꼭꼭 담아왔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그 미묘한 각도의 차이를, 한 걸음 한 걸음을 땔떼마다 다르게 보이는 트레비 분수를, 오직 경험으로만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그 분수의 부분 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느릿느릿 분수를 담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처음과 달리 오히려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나의 사진 실력으로는 감히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막상 분수를 볼 때 아무 생각이 안 들기도 했다. 분수가 아름답다는 생각 말고는.. 정말 그 순간 트레비 분수에 홀려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챙겨간 동전도 깜박하고 못 던지고 왔으니, 정말 분수만 바라보고 감상하며 아무 생각 없이 거의 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가끔 정말 멋진 것들이 주변의 상황 때문에 그 빛을 못 발하는 경우가 있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은 참 많은 생각과 영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중, 고등학교 때 시험의 대상으로 전락해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처럼. 만약 트레비 분수도 처음의 기억만으로 남았다면 한국에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트레비 분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트레비 분수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언제나 아름다운 분수였고 물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사실 내가 트레비 분수를 마주할 준비가 안 돼있었던 것이다. 


본질을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엄마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분장을 해도 우리 엄마임을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옆집 아줌마는 선글라스만 잠깐 끼고 있어도 못 알아보기 쉽다. 


나에게 낯선 것,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익숙한 것에 비해 알아보기 힘든 만큼 본질을 알아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상황이든 그 어떤 것이든. 알고 보면,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것들 투성이인데 때로는 고약한 주변 상황들에 속아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면 너무 억울하다. 트레비 분수 앞에서 아름다운 오늘은 한 번뿐인데 오늘은 두 번 와볼 수도 없는 것인데 조금 더 상황보다는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트레비 분수는 늘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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