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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지 Mar 26. 2017

소심한 기록

기억을 잡아두기 위해서

봄이 온다.


작년 겨울에 떠났던 유럽여행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애써 외면한 채 일상의 분주함에 치여 늘 다음으로 밀려났던 글쓰기. 꼬박 2주를 하루도 못 쉬고 일을 하고 나서야 시간이 나 대전에 있는 친구를 보러 갔다. 그리고 한밭 수목원에서 정말 오랜만에 힐링을 느꼈다. 그리고 무심코 던진 친구의 한마디가 내 마음을 다시 요동치게 만들었다.


글 좀 다시 쓰시죠 작가님,


물론 친구가 놀리느라고 붙인 '작가'님은 분명 친구의 애칭이었고, 사실 개인적으로는 늘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일기장에) 글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을 안 했는데(다 변명이고) 요즘에 정말 뜸했다. 처음에 브런치를 알게 되고 작가를 신청해서 작가가 되었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브런치에 받은 메일에 작가라고 불렸을 때 그 벅찬 감동이 분명 있었는데 일상이라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지냈다.


중 2 때부터 다이어리를 적었지만 본격적으로 늘 수첩을 휴대하고 메모하는 습관은 작년 봄에 생겼다. 그리고 작년 봄부터 지금까지 쓴 수첩이 벌써 8권이 되었다.


최근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기록은 덜해서 한 권을 3개월째 쓰고 있는데, 생각이 많았던 어떤 때는 한 달에 한 권으로도 모자란 경우도 있었다.


오랜만에 사진을 찍기 위해 예전 노트를 꺼내 한참을 읽었다. 새삼 예전에 쓴 노트를 보면 내가 이런 글을 썼었나 싶을 정도로 스쳐버린 순간과 낯선 글들도 있다. 그만큼 그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지난 2년 동안의 농도 있는 순간, 깨달음의 순간 그리고 감탄의 순간순간들이 모여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고, 어느 한순간 덜 소중한 기억은 없지만 유럽여행 내내 들고 다니며 기록했던 노트는 그중에서도 정말 소중하다.


수첩 맨 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때 묻지 않은 근사한 노트보다 많이 구겨지고 다듬어지지 않더라도 내 기억, 그곳에서 나의 생각을 담은 이 노트가 나에게는 소중해질 것이다. 아끼고 아끼다 때를 놓쳐 유행이 지나버린 옷장 속 옷은 버리지도 못하고 늘 그 자리에 걸려있다. 그래서 어쩌면 내 기억 속엔 오히려 (밖에서 입으려고 샀지만 실패해) 잠옷이 된 옷이 더 예쁘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아끼던, 참 맘에 드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소심한 기록, #일상의 영감, #유럽여행, #스물일곱의 마무리, #끝 그리고 새 출발, #두근두근, #D-4(2016년 10월 23일 일요일)


이 노트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기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수첩을 모으는 취미가 생겼고(지금도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새 수첩이 3권이나 있다), 제주도 소심한 책방에서 산 정말 맘에 든 노트이기도 했고, 일상의 기록보다는 더 특별한 생각과 경험을 기대할 수 있는 유럽여행을 함께한 수첩이기도 했으며, 2년을 다니던 회사의 퇴사라는 마침표와 이어져 있었던 여행이었기 때문에 첫 장부터 이 노트가 특별해질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여행이 1/3 정도 지났을 때 파리에서 이 노트를 잃어버렸었다. 


파리의 동네마다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십일 정도 머물면서 호텔을 3번이나 옮겼는데, 두 번째 호텔에 도착해서 일기를 쓰려고 보니까 노트가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여행 도중에 카메라나 휴대폰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때도 이 노트를 잃어버렸을 때만큼의 상실감은 아니었다. 물건이 아니라 기억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걸어가다가도 어떤 기분이 들면 잠시라도 멈춰서 기록을 했기 때문에 그날 하루에도 노트를 잃어버릴 찬스가 너무도 많았어서 노트를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감히 찾을 엄두가 안 났었다. 


결국엔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도무지 답이 안 나오자 수첩에 대한 집착을 단념을 하기 위해서, 그냥 어차피 지나칠 수도 있었던 순간순간에 글을 쓰는 행위로라도 그 순간을 조금이나마 뚜렷하게 만들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부터 시작해, 사실 어차피 이미 쓰고 나면 잘 안 읽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공수래공수거'까지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달랬던 것 같다. 


그걸 보던 함께 간 친구가 어이가 없었는지 이전 호텔에 전화라도 해보자며 나를 끌었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으로는 통화도 안돼서 프런트로 내려가 프런트 직원한테 이 상황을 모두 설명해 어렵게 전화를 빌렸다. 그리고는 이전 호텔로 전화를 걸어 반지의 제왕 골룸이 절대 반지를 원하는 심정으로 my precious green note를 외치며 열심히 상황 설명을 했다. 다행히도 짐을 쌀 때 놓고 왔는지, 이전 호텔에서 노트를 보관하고 있었고 그때 시간이 새벽 1시였는데 바로 대중교통으로 40분 거리인 그 호텔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음날 찾으러 갔어도 됬었는데 그때는 그 노트를 손에 쥐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던 것 같다.


허겁지겁 도착한 호텔에서 확인한 노트는 다행히도 내 노트가 맞았고 지금은 이렇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어 내 옆에 남아 있다.

그리고 첫 장에는 짧지만 내 손을 떠난 순간들의 기억이, 영광의 상처되어 그때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 몇 시간,  노트가 내손을 떠나 있었던 동안 이전 호텔 직원이 노트를 펴봤나 보다. 하지만 한글만 가득한 그 노트를 그 직원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겠지.. 그리고 다시 찾으러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어설프게 한글을 따라한 흔적이 역력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꺼낼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때 이 노트를 잃어버렸으면 어쩌면 그때 생각했던 무소유와, 공수래공수거가 나의 기록을 멈추게 했을지도 모른다. 잘 잃어버리고 덜렁대는 성격은 여전하지만 다행히도 지금까지 어딜 가든 노트를 들고 다니는 습관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때 전화를 빌려준 프런트 직원과는 정말 친해져서 내 기억에 파리에서의 그 호텔이 유럽여행 중 가장 그립고 또다시 머물고 싶은 호텔이 되었다. 또 이때의 기억이 해피엔딩으로 끝나 오히려 더 쓰는 것에 대한 기쁨이 커져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지금 이 굳은 생각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일상들이 그리고 바쁜 생활들이 글 쓰기에 게을러질 수 있는 핑계를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게는 큰 행복이라는 것 그리고 아주 조금씩 더디더라도 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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