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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Jul 11. 2021

안개 속 가려진 진실

밤으로의 긴 여로-유진 오닐

 어린 시절, 집의 한쪽 벽면 '家和萬事成'이라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내겐  가훈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극작가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를 사후 25년 간 발표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던 것처럼 나 또한 행복하지 않았던 시기의 글을 세상에 공개하기엔 아직 용기가 충분치 않기에, 소금기 어린 몇 개의 조각난 글들은 작은 파일 형태로 마무리되지 못한 채 갇혀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후자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의 극작가였던 그는 유작인 동시에 스스로의 삶이 드러난 자전적인 희곡을 창작하며 사후 네 번째 퓰리처 상을 게 된다.


 흥미롭게도 1막부터 4막에 이르기까지 무대 배경은 타이론 가족의 여름 별장 거실을 벗어나지 않으며, 시간 또한 아침부터 자정까지로,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적 제약을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타이론의 가족과 하녀 케슬린이 전부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적인 분위기는 이야기를 지루함으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막이 진행됨에 따라 가족 간의 긴장감을 가중시킬 뿐이다.




 타이론 일가는 매년 그들의 별장에서 여름을 보낸다. 언뜻 보기엔 평화로운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초반부터 가족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다.


 아내 메리는 내내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인다. 사실 그녀는 모르핀 중독 환자다. 최근에 메리의 약물 중독 증상이 호전되면서 타이론 가족은 안도감을 느끼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극심한 금단 현상을 겪게 된다. 결국 그녀는 잠을 잔다는 핑계로 2층으로 올라가 모르핀을 투여한다. 이에 가족들은 그녀에게 실망감과 원망을 감추지 못한다. 이후 그녀는 타이론과 결혼하기 전, 수녀원 시절로 돌아가 현실을 버리고 과거 속으로 빠져든다. 맏아들 제이미는 서른이 넘도록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술집을 드나들며 여자들과 가벼운 사랑을 나누고 노동이라고는 아버지 타이론의 일손을 돕는 게 전부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동생이 배우도록 애쓰며. 대부분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막내아들 에드먼드는 자주 발작적인 기침을 토해내는데, 의사를 통해 폐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어머니 메리를 닮아 마음이 여리고 예민하며 죽음과 관련된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한다.


 각자가 가진 문제는 가족 관계의 큰 균열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모든 원인은 아직 소개되지 않는 남편 타이론이라는 걸 대화가 고조됨에 따라 조금씩 알게 된다. 그는 연극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하루하루 호텔을 전전하며 가정을 꾸려나갔다. 결국 메리는 집이 아닌 호텔에서 제이미와 에드먼드를 출산해야 했다. 또한 그는 땅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구두쇠에 술꾼이다. 이에 아내는 신혼 때부터 술을 진탕 마신 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그의 생활로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온전한 집이 아닌 싸구려 별장에서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극심한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결국 메리는 병원을 찾게 되는데, 돈을 끔찍이도 아끼는 타이론은 그녀를 값이 저렴한 돌팔이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한다. 의사는 고통을 없애는 것에만 치중하며 모르핀을 처방하고, 이로 인해 그녀는 약물 중독에 헤어 나오지 못한다.


  타이론의 성격은 두 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는 제이미에게 돈만 축내는 노동의 가치를 모르는 놈이라고 끊임없이 그를 비난하고 동생 에드먼드와 비교한다. 때문에 제이미는 동생을 질투하고 방탕한 생활을 멈추지 않는다. 또한 폐병에 걸린 에드먼드는 의사에게 요양 생활을 장기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타이론은 이런 아들을 걱정함과 동시에 값싼 요양 병원에 보내려 애를 쓴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에드먼드는 씁쓸하고 슬픈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하지만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낳듯이, 타이론이 부동산 외에 다른 지출은 최소화하려 했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에게 있다. 타이론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이유로 타지에 살고 있던 그의 가족들을 버려둔 채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 당시 열 살 밖에 안 된 타이론은 어머니와 누이들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면서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고 모든 걸 절약해야만 했다. 그는 이러한 가정환경을 통해, 돈의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삶을 살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가 연극배우로서 가졌던 자부심마저 돈 앞에서 힘 없이 무너져 버린다.


 타이론 가족의 갈등이 심화되는 이유는 서로의 문제를 똑바로 마주 보지 않고 회피하려는 모습에 있다. 남편과 아들 에드먼드는 메리에게 다시 시작된 마약 중독 현상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이는 메리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에드먼드의 폐병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메리는 자신의 아들이 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단순한 감기일 뿐이라며 아들의 질병을 애써 외면한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이러한 '회피'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가 1막에서 4막 모두 등장한다. 바로 '안개'이다. 자정을 향해 가면서 안개는 점점 짙어지고, 동시에 가족 간의 갈등 또한 깊어진다. 에드먼드의 대화에서 안개의 의미가 잘 드러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메리는 마약을 통해, 타이론과 두 아들은 술을 통해 현실을 잠시라도 잊는 것뿐이다.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스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거요."




 초반에 설명한 바와 같이 이 희곡은 유진 오닐의 삶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 연보를 살펴보면 아버지 제임스 오닐은 타이론이라는 인물과 닮아 있고, 유진 오닐 자신은 에드먼드의 삶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밤으로의 긴 여로'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꺼내고 또 곱씹고 감정을 절제하며 담담히 대화체로 풀어내기 위해 애를 썼을까. 자전적인 글은 그만큼 진실한 글이기에 훌륭한 작품이 나올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 봄이 불가피하다. 얼마나 많은 눈물과 피를 흘려야 하는 걸까. 사후에야 발표한 작품이지만, 가족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위해 썼던 그의 거대한 용기에 존경을 보낸다.

 

 사랑하는 당신,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바치오.

 행복을 기념하는 날의 선물로는 슬프고 부적당한 것인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당신은 이해하겠지.

 내게 사랑에 대한 신념을 주어

 마침내 죽은 가족들을 마주하고 이 극을 쓸 수 있도록 해 준,

 고뇌에 시달리는 타이론 가족 네 사람 모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와 용서로 이 글을 쓰도록 해 준,

 당신의 사랑과 다정함에 감사하는 뜻으로

 이 글을 바치오.


 -열두 번째 결혼기념일, 아내 카를로타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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