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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Jul 18. 2021

치매 마을 속 숨겨진 돈의 민낯, 그리고 노인의 비애

레모네이드 할머니-현이랑

 16년 전 돌아가신 나의 친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할머니는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보다 울음이 많으셨고 현재보다 과거 속을 자주 여행하셨다. 당신의 방은 자주 오물로 뒤덮였고 엄마는 시어머니의 대변으로 얼룩진 벽과 바닥을 묵묵히 닦으셨다. 그때의 난 사실 할머니가 미웠다. 엄마의 헤아릴 수 없는 고생을 내 눈으로 직접 봤기에. 그런데 학교 쉬는 시간에 평소처럼 친구들과 놀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지금 집에 어서 가 보렴. 할머니가 돌아가셨단다."


 갑자기 뇌의 모든 기능이 정지했다. 나는 겨우 멍한 상태를 벗어나 가방을 싸고 교실을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빨라질수록 시야는 점점 흐려졌다. 집에 오니 아빠는 울지 않았지만 조금 슬퍼 보이셨고 엄마는 조금 우셨는지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할머니는 거실에 눈을 감은 채 누워계셨다. 나는 결국 숨을 헐떡이며 소리 내어 울었다. 엄마는 나에게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리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손은 차가웠다. 할머니의 왼쪽 가슴에 볼과 귀를 살며시 놓았다. 하지만 어떤 울림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꿈속에서 고통 없이 평온하게 소천하셔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할머니, 거기선 훨씬 더 행복하게 지내는 거지?"




  '레모네이드 할머니'를 읽고 어린 시절 경험이 자연스레 떠올랐던 이유는 이 책이 치매 요양 병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요양 병원과는 사뭇 다르다. 이곳은 치매 노인들의 불안감은 최소화하고, 자율성은 극대화하기 위해 병원 느낌의 분위기는 숨기고, 대신 도란마을이라 불리는 현실에 가까운 마을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도란마을에 사는 치매 노인들은 진행 속도가 훨씬 더디고 더 건강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


 이미 눈치챈 독자분들도 계시겠지만 도란마을에 살며 이러한 혜택을 누리는 노인들은 모두 엄청난 부자이다. 매달 1000만 원이 넘는 거금을 이곳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도 유독 가장 부유한 노인이 있는데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도란마을의 부동산 소유주였던(이제는 요주의 인물인 원장에게 넘어갔다) 레모네이드 할머니이다. 그녀가 항상 레모네이드만 마시기에 생긴 별명이다. 아직 치매 초기 단계에 있는 그녀는 도란마을의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에 따분함을 느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흥미를 돋을 만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마을 쓰레기장에서 아기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영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이 쳇바퀴 같은 일상을 벗어날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수사를 시작하려 한다. 바로 이때, 유치원을 다닐 나이로 추정되는 남자아이가 할머니에게 동행을 제안한다. 아이들을 싫어하는 그녀지만, 보통의 아이들과 달리 상당히 어른스럽고 똑똑한 꼬마의 모습에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할머니와 꼬마가 조금씩 증거를 수집해가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미스터리 추리 소설은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수록 단순한 영아 살인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된다. 겉보기엔 평화로워 보이는 고급 치매 요양 병원이지만 퍼즐 조각이 맞춰질수록 바깥세상과 다를 바 없는 상류층의 부정부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까칠하지만 조금은 따뜻한 레모네이드 할머니와 큰 상처를 받은 탓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꼬마, 그리고 이 사건에 협조적인 다수의 도란마을 사람들은 과연 영아 살인 사건의 범인과 함께 꽁꽁 묻어둔 모든 비리를 파헤쳐 땅 위로 드러낼 수 있을까.



 

 현이랑 작가의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언뜻 보기엔 의미보다는 스토리의 흥미에 초점을 둔 추리소설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의 초반부만 벗어나도 작가는 독자들이 사유할 수 있는 다양한 현실 문제들을 계속해서 던져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낙태, 갑질, 상류층의 비리 등을. 그리고 이 모든 문제엔 돈이 얽혀 있다. 인간의 금전적 욕망이 얼마나 구역질 나는 이기심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이 외에 아직 언급하지 않은, 그리고 나에게 가장 긴 여운을 남긴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늙은 몸은 인간의 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썩어 가는 고목에 가깝다. 우리의 정신세계는 얼마나 '젊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걸까. 인간의 '몸'이라 하면 근육이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단단하고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굴곡이 살아 있는 몸을 떠올리지 않는가. 그러나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이 그것은 잠시 뿐, 우리는 천천히 썩어가는 몸과 더 오래 살아간다.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거라고 말해 주는 이는 별로 없다. -p. 98


  요즘의 사회는 모든 게 빨라지고 편리성이 우선시되면서 젊은 세대에 초점이 맞춰지는 흐름이 심화되고 있다. 무인 키오스크, 배달앱 등의 기능은   노인들을 위축시키게 한다. 자녀들 없이 혼자서 식당을 이용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반대로 노인들의 편리를 위한 요양 시설의 경우, 자녀들이 이를 악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소설에서 잘 드러나 는 부분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 충분한 여력이 있음에도 그들은 귀찮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요양 시설에 맡겨버린다. 여기선 치매라는 요소를 넣어 자식들이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가 된 부모에게 대하는 모습을 부각해서 드러내고 있다. 노인들의 자리가 가장자리가 아닌, 중심부에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섞여 어울릴 수 있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글의 구조적인 면에서도 독특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한 가지 시점으로만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작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작가가 도란마을과 주민들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후 챕터부터  열 번째 챕터까지는 화자가 대부분 다른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뀐다. 이를 통해 독자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개인적인 사정을 면밀히 알게 되고, 그들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챕터는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뀌며 깔끔한 결말에 이른다.


 상큼하고 샛노란 배경의 표지와는 달리, 사건의 진실이 벗겨질수록 회색빛을 띠는 추리 소설.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시니컬한 레모네이드 할머니의 뒤를 꼬마와 함께 따라가 보길 바란다.




 사실 마을이라고 해서 딱히 좋은 곳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했지만 들여다보면 구역질 났다. 어딜 가든 그렇지 않겠냐만은. -p. 81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참고 참고 참아서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버는 것이다. -p. 93


 예전엔 어느 중견기업의 회장이었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여기 오면 모두가 똑같아진다. 그냥 세 살짜리 애가 되어 버린다. -p. 114


 가끔 자기 부모를 돌봐주는 사람들에게 저렇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자기 손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 자기 부모를 돌보는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면 자기 부모가 무슨 대접을 받게 될 줄 알고 저러는 걸까. 실제로 직원들이 주민들에게 뭘 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 애초에 저 사람들은 자기 부모가 어떤 대접을 받든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 마을도 자식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만들어졌는지도. 직원들의 돌봄은 그들의 죄책감을 떨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p. 117


 누군가는 고시원 방을 보고 관짝이 아니냐고들 하지만 나는 비행기 퍼스트석이라고 생각한다. 비행기 퍼스트석에 타 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많이 봤다. 구조도 내가 쓰는 방과 비슷했다. 침대에 책상, 작은 창문. 내게는 거기다 작은 샤워실까지 있다. 다만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지 모를 뿐이다. -p. 126-127


 원장님이 나를 몰아세운다. 어째서 나를 이렇게 가혹하게 다루는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직원, 주민, 방문객들도 있다면서……. 문득 나는 내가 그들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마디로 원장님에게 가장 만만한 것이다. 언제 잘라도 이상할 것 없는 힘없고 어린 비정규직. 원장님이 원하는 것은 진상의 규명이 아니라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대충 덮고 넘어갈 수 있도록 처형할 본보기이다. -P. 134


 "돈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돈이 내 생활을 지켜줄 수는 있어도 나를 구원할 수는 없어……." -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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