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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Sep 26. 2021

압축된 종이 더미 속 삶의 허무, 전진과 후퇴

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

 (이번 서평은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번을 읽고 나서야, 그의 시끄러운 독백에 어렴풋이 동참할 수 있었다.


 140여 페이지의 얇은 책 속엔 삼십오 년간 지하에서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한탸라는 사내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 그는 온갖 종이, 심지어는 고기를 포장해 핏물이 흠뻑 밴 정육점 종이까지도 자신의 길들여진 압축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지하실은 쥐들이 들끓만큼 지저분하고 천장의 뚜껑 문에선 폐지와 함께 소장의 질책이 끊임없이 쏟아지지만, 그는 이 일이 싫지 않았다. 천장을 뚫을 기세인 수많은 폐지 더미 속에서, 그는 매일 보물 찾기를 시작한다. 그 속엔 칸트, 카뮈, 니체 등의 철학자가 쓴 책과 명화의 모조품이 숨어 있다. 한탸는 이 보물들을 찾아내며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는다.


 그에겐 작은 꿈이 있었다. 철도원이었던 외삼촌이 은퇴 후 자신의 정원에 낡은 선로 변경 장치를 사들여 설치했던 것처럼, 한탸도 5년 후 자신의 낡은 압축기를 사들여 외삼촌의 정원에 두길 원했다. 그는 매일 읽을 가치 있는 책들을 지하실에서 가져와 자신의 집에 쌓아두었는데, 은퇴 후 이를 사들인 압축기로 꾸러미를 만들어 마당에 전시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자살로 인해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한탸의 독백은 다양한 대조로 이루어지는데, 그중 하나가 전쟁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시대적 배경은 체코 프라하가 공산주의 체제하에 있던 1960년대다. 그 말인즉슨, 한탸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물임을 뜻한다. 책에선 이 전쟁을 쥐의 영역 싸움에 비유한다.

쥐들이 지체 없이 두 개의 무리, 두 개의 종족, 두 개의 조직화된 사회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서는 쥐들이 생사를 건 대전쟁을 벌이는데, 승리하는 쪽이 포드바바까지 흘러가는 배설물과 오물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승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영국, 소련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승전국들은 또다시 둘로 나뉘게 되는데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이 바로 그것이다. 체코는 소련의 감시를 받으며 후자에 속하게 된다.


 어느 날 한탸는 지하실의 책 더미 속에서 프로이센 왕실 도서를 무더기로 발견한다. 그는 이 금서를 압축기에 넣는 대신, 프라하의 외무성 부속 건물에 숨겨 둔다. 하지만 누군가 장소를 누설하는 바람에 압축기 속 신세와 다르지 않게 된다. 책을 사랑한 한탸는 빗물에 엉망이 되어가는 책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금서를 압축하는 일이 계속될수록, 금세 적응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한탸가 적응한다기보다는 죄책감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 가치 있는 책들을 집 안에 쌓아 두는데, 아무리 훗날 꾸러미를 만들기 위해서라지만, 침대와 화장실에 발 디딜 틈 없이 올려 둔 책더미는 그의 작은 몸짓에도 무너져 그를 압사할 것 같다. 실제로 그 두려움에, 한탸는 침대에 마음 편히 몸을 뉘이지 못한다. 8장에선, 침대 위의 책들을 '스스로 걸어놓은 다모클레스의 검'이라 말한다. 쉽게 말해, '왕관을 쓴 자는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가 역사에 남을 중요한 책들을 압축하는 죄책감을 이런 식으로 회개하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는 삶과 죽음이다. 그에게 삶은, 사랑 그 자체였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라고 할 만큼 한탸는 압축공 일을 사랑했다. 압축기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흐뭇하게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한 평생 책 속에 파묻혀 있기만 하지 않았는데, 그에겐 사랑하는 두 여자가 있었다. 한탸는 젊은 시절, 만차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지금과 달리 한껏 외모를 치장했던 그는 무도회에서 만차와 춤을 추며 행복해한다. 그런데 긴장한 탓에 만차가 화장실을 가게 되고, 잠시 후 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머리에 묶인 리본에 묻어 있는 똥과 이를 본 사람들이 경악하고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며 수치심에 도망쳐 버린다. 몇 년이 흐르고 한탸와 만차는 재회하지만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며 또다시 수치심을 느끼고 만다. 이후 한탸는 그녀를 오랫동안 볼 수 없었다. 나는 동시대에 살았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렸다. 거기엔 '키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한 마디로 '똥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을 뜻한다. 만차 또한 키치적인 면모를 보이며 인간의 가벼운 모습을 부정했고, 똥에 대한 수치심과 모욕을 벗어나 명예를 회복한 뒤에야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한탸의 그녀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녀에게 닥친 일은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었다.

 두 번째 여자는 어린 집시 여자였다. 한탸를 따라다녔던 그녀는 결국 그의 집까지 따라오며 함께 동거를 시작한다. 한탸는 집시 여자의 순수한 모습을 사랑했다. 난로에 불을 지피고 감자 스튜와 말고기 소시지를 매일 먹어도 만족했던 여자. 하지만 그녀는 다른 집시 여자들과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소각되고 만다. 그녀의 이름은 마지막 장에서야 등장하는데, 이 이름에도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또한 한탸는 가족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게 된다. 2장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스스로 화장터의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며 생각한다. 인간이 죽어서 뼛가루가 되는 과정은, 자신이 책들을 압축해 납작한 꾸러미로 만드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그 순간 머릿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

 

 5장에선 외삼촌이 선로 변경 초소에서 뇌졸중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는 보름이나 그곳에 방치되어 있어, 시신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한탸는 외삼촌의 관에 그가 역무원 일을 하면서 수집했던 쇳덩어리를 유품으로 넣어 둔다. 두 번째 죽음은, 한탸의 자살에 첫 번째 복선을 깔아주게 된다.


 마지막 대조는 전진과 후퇴이다. 6장에선 한탸가 삼십오 년 간 사용했던 압축기의 스무 배 효율을 가진 대형 압축기가 등장한다. 그는 직접 그 기계를 두 눈으로 보기로 결심한다. 원래라면 자신이 직접 폐지를 압축기에 넣은 후 버튼을 눌러 직접 꾸러미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모습에 한탸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가장 회의감이 들었던 건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미국식 작업복을 입은 채 무심히 책의 표지를 뜯어내고 내장처럼 드러난 내용물을 움직이는 컨베이어 위로 던지는 행위를 반복했다. 한탸처럼 책을 들쳐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탸에게 그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저 거대한 압축기가 다른 모든 압축기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도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작업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젊은 노동자들의 미국식 작업복은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도래함을 의미한다. 그들에겐 기계화로 인해 완화된 업무강도와 해외에 갈 수 있는 휴가가 주어진다. 하지만 한탸의 세게에선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는 오롯이 폐지 더미에서 발견한 책을 통해서만 그리스에 갈 수 있었다. 한탸의 회의감을 명징하게 만들어주는 부분이 바로 4장, 예수와 노자의 환영이다. 평소처럼 맥주를 잔뜩 마신 어느 날, 그의 눈앞에 예수와 노자가 나타났다. 한탸는 둘의 모습을 이렇게 비유했다.

예수가 낭만주의자라면, 노자는 고전주의자였다. 예수는 밀물이요 노자는 썰물, 예수가 봄이면 노자는 겨울이었다. 예수가 이웃에 대한 효율적인 사랑이라면, 노자는 허무의 정점이었다.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미래로의 전진)이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두 오리기넴(근원으로의 후퇴)이었다......


 여기서 예수는 젊은 사회주의 노동 단원들을, 노자는 늙은 한탸 자신을 뜻한다. 결국 그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 다른 환영인 세네카가 욕조에 누워 손목 동맥을 자르며 자살했던 장면을 복선으로, 삼십오 년간 함께했던 낡은 압축기 속에 들어가 '근원으로의 전진'을 택하며 초록색 버튼을 눌러 숨을 거둔다. 미래로의 후퇴,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을 선택한 것이다.


 한탸의 그로테스크한 죽음은 내게 처음으로 책을 읽는 행위에 회의감을 느끼게 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으며 교양을 쌓아도, 우린 자연과 제도 앞에선 무력하구나. 한탸의 책에 대한 러브 스토리가 끝이 났을 때 들었던 허무함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꾸러미를 만들어 하나하나 철사로 동여맨 뒤 최대한 단단히 조인다. 책들은 어떻게든 굴레에서 벗어나려 해보지만 철사를 이길 수는 없다.


 내게 짧고 강렬한 인상을 준 '시끄러운 고독'은 4, 5, 8장을 제외하고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란 문장이 조금씩 변형된 채로 장마다 반복되고 있어, 장편소설이지만 시집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반복되는 문장은 한탸가 압축공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폐지 더미 속에서 발견한 책의 문장들을 음미하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부각한다. 그렇기에 한탸의 죽음에 대한 나의 사유는, 더욱 시끄러워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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