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자극과 기억의 상관관계라곤 전혀 없는 게시물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5초에 한 번 꼴로 스크롤을 내리다 그의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피드를 보게 되었다. 처음엔 작가의 재치 있는 그림과 문장에 감탄하며 깔깔거렸고 이번에도 5초를 넘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1분이 넘도록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 갑자기 웃음 대신 눈물과 콧물이 터졌다. 독자가 '우울감에 자꾸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저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라고 보낸 질문에 키크니 작가는 작지만 환하게 빛나는 촛불 그림과 함께 이런 문장을 남겼다.
우린 초라, 해 져도 다시 빛나.
당시의 내 상황과 비슷해서 그랬는지, 과거의 내가 떠올랐어서인지는 모르겠다.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뜨거운 물풍선이 터져버렸다. 여운은 물이 몸에 스며드는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나는 저 한 문장으로 작가의 모든 작품이 궁금해졌고, 팔로우한 상태로 수십 개의 피드를 연달아 감상했다. 역시나 깔깔대다가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렸다. 키크니 작가의 게시물 대부분은 '겉바속촉'이란 단어와 잘 어울렸다. 처음엔 바삭한 스낵류 같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촉촉하고 은은한 맛이 난다. 그가 왜 팔로워 90만 명을 바라보고 있는 프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지금 소개할 <일상, 다~반사> 또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른 점은 구성 방식과 독자의 사연이 아닌 키크니 본인의 일상이 주제라는 것. 먼저 4컷 만화로 바삭하게 독자들을 웃겼다면, 챕터의 마지막은 자신의 속이야기를 담담하게 글로 꺼내어 독자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유퀴즈를 봤다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는 SNS에 만화를 올리기 전까지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많은 예술가가 그렇듯이 급여에 비해 높은 업무 강도에 시달렸고, 결국 약 10년 차가 되었을 때 심한 번아웃이 찾아왔다. 단톡방에 있던 14명의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자신을 산책시켜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던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퇴사 전까지 우울증과 불안증세에 시달려왔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약 6개월 뒤 그는 SNS에 자신이 진짜 원하는 만화를 그려 올리기 시작했고 이를 본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댓글을 남겼다. 기분 좋게 보던 작가는 '댓글을 이용해 만화를 그려보면 어떨까'하는 영감이 떠올랐고 그들의 사연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 뒤, 키크니 작가는 <일상, 다~반사>같은 책을 출간할 만큼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좋아하는 일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
만화 에세이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다 읽는 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내용은 대체로 재밌지만, 중간중간 그의 삶을 들여다보다 눈물을 훔칠지 모른다. 읽으면서 작가가 강약 조절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겉바속촉한 과자를 먹으며 읽기에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그림보다 글이 더 많은 책을 선호하는 편인데, 키크니 작가 덕분에 관점이 조금 달라졌다. 한컷의 그림과 한 줄의 글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지 알게 되었다. 그의 천재적인 언어유희 능력을 평생토록 써먹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