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북 큐레이션 2급 자격 취득을 위해 줌 수업을 듣고 있다. 매주 과제가 나가는데, 저번 시간엔 책이나 독서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간단히 소개를 해오는 것이었다. 무얼 읽을까 고민하다 과제에 최적화된 제목을 가진 키스 휴스턴의 <책의 책>을 골랐다.
사실 내가 가장 서먹하게 대하는 책 분야가 바로 역사서이다. 다양한 감정을 건드리는 문학작품을 선호하기 때문에 사실관계 파악에 집중하는 책들은 여운이 별로 남지 않아 자발적인 독서를 어려워한다. 그래서 이 기회에 편독하는 습관을 고쳐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니 친해지기 한결 수월할 꺼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와 선뜻 가까워지진 못했다.
<책의 책>은 사실 모든 책 중에서도 '종이책'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작가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자책 이전부터 있었고, 종이와 잉크, 판지, 풀로 이뤄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장치로서, 이제 것 우리와 함께했고 우리가 오랫동안 신뢰했던, 유형의 책에 관한 책이다." 그래서 전자책은 간혹 첨언을 위해 등장할 뿐 한 문단 이상을 차지하지 않는다. 나처럼 킨들 같은 기기를 이용해 읽기보다 종이의 질감, 냄새, 묵직한 무게감 등 책 자체의 물리적인 특성도 읽기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며 종이책 독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책이다.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부터 3장까지는 책에 들어가는 재료인 종이, 본문, 삽화의 역사를, 마지막 4장은 책의 형태에 대한 변천사를 논한다. 모두 고대 이집트, 로마,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가장 흥미를 보였던 1장에서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종이로 발전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나무로 제작되는 지금의 종이와 달리 먼 과거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필기 재료가 있었다. 두 가지가 등장하는데 바로 '파피루스'와 '양피지'이다. 인류 최초로 사용된 종이의 일종이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는 나일강기슭에서 무성하게 자라나는 파피루스 풀로 제조되었다. 책에선 파피루스 풀의 삼각형 모양 줄기를 이용한 최초의 필기 재료 제작 방법을 설명한다.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에 파피루스 줄기 모양을 본뜬 신성문자를 기록하며 책의 시초를 알렸다. 하지만 약 3000년 후 양피지가 등장하면서, 그것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양피지는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가 발명했으며, 가장 비윤리적으로 제작되었다. 염소나 양 같은 동물 가죽이 주재료이며, 어린 동물을 사용한 양피지일수록 최상품이라 여겨서 유산되거나 사산된 새끼 동물을 자궁에서 꺼내 사용했다고 한다. 종이의 앞뒤를 살펴보면 각각 털과 피가 빠져나간 정맥 자국을 관찰할 수 있다. 이토록 끔찍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을뿐더러 과정도 까다로웠던 양피지를 파피루스 대신 사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거칠고 잘 부서져 금방 닳기 쉬운 파피루스와 달리, 양피지는 매끄럽고 복원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피비린내 나는 제조 과정이 만들어낸 핏기 없는 순결한 물질, 수 세기 또는 수천 년 동안 사막의 더위와 유럽의 냉기를 견뎌낼 수 있는 우아한 필기 재료. 고대와 중세의 작가들이 그 시대에 가장 중요했던 종교, 문학, 과학 주제의 글을 기록한 매체. 그게 바로 양피지다.
이제 현존하는 종이의 재질과 가장 근접한 종이가 등장한다. 이를 발명한 사람은 중국의 환관인 '채륜'이었다. 이전까지 중국은 대나무 조각들을 이어 붙인 죽간이나 비단에 글자를 써왔다. 하지만 대나무는 무겁고 비단은 비쌌기 때문에 두 가지 단점을 모두 보완할 새로운 필기 재료가 필요했다. 채륜은 닥나무 속껍질을 이용해 진짜 종이를 제작했고 이는 훗날 가볍고 저렴한 성질을 가지게 되었다.
2장은 문자와 인쇄의 역사를 소개한다. 인류 최초의 문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이 쓰던 '설형문자'다. 그 당시 사람들은 두꺼운 점토판에 이 문자를 기록했고 주로 회계 장부로써 활용했다. 이후 중국의 갑골문자, 이집트 상형문자를 비롯해 현존하는 고대 문자의 전 생애를 자세히 다룬다. 이렇듯 문자의 발달과 종이의 발명으로 책의 중요성이 높아지자, 필경사라는 직업이 등장했다. 책의 원본을 새로운 종이에 필사해 똑같은 책을 여러 권 제작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필경사들의 작업은 결과에 비해 품이 많이 들었다. 15세기경, 독일 마인츠 출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이러한 비효율적인 생산 방식의 고리를 끊어낸 장본인이었다.
그는 최초의 금속 인쇄술을 발명한 인물로, 가동 활자를 이용해 <문법학>이라는 라틴어 교과서를 가장 먼저 인쇄했다. 책에선 당시의 인쇄 작업과 기술을 그림과 함께 서술한다. 산업혁명이 발생하면서 인쇄술의 기술은 더욱 발달하였고 지금의 출판업계에서 이용되는 인쇄기가 되었다. 지금도 필경사는 존재하지만 중요한 문서 작업을 할 때만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책은 주로 글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림이 아예 없는 책은 드물다. 표지에도, 본문에도 삽화나 사진이 들어가 있다. 3장에선 이와 관련된 역사를 소개한다. 여기엔 채색 사본 제작 과정과 기술, 목판, 동판, 석판 인쇄술이 등장한다. 삽화의 등장으로 인쇄 기법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고, 이는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후반부엔 목판술을 위협했던 다게르와 텔벗이 발명한 사진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 장은 책의 겉모습에 관한 발자취를 살펴본다. 직사각형 모양은 변함이 없지만 지금 같은 형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책은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왔다. 파피루스 시절의 두루마리 모양부터 속을 판 나무판에 밀랍을 붓고 굳힌 면에 필기를 했던 서자판과 지금의 종이책과 비슷한 형태인 코덱스 제본이 나와 있다. 마지막엔 책의 규격 크기가 정해진 과정으로 500여 페이지의 <책의 책>이 마무리된다.
절대 쉬운 책은 아니다. 종교적인 어휘가 많이 나오고 책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에 다음 날 읽어 보면 절반 정돈 휘발되어 버릴 것이다. '책의 해부학'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하지만 의학. 보건계열이 아니더라도 인체의 신비기 궁금할 수 있듯이, 책의 역사를 전문으로 하고 있진 않지만 지금의 종이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과감하게 읽어보길 바란다.
p. 228
텍스트와 이미지는 아무 말 없이 전자공학적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실제 세계와는 만나지도 않고 인쇄될 준비를 마쳤다. 인쇄된 책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공예품일지 모르지만, 책 제작 과정은 디지털 작업임이 틀림없다.
p. 242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로마인들이 쓰던 각진 대문자를 둥글둥글하게 매만졌을 뿐만 아니라 필사 작업의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단어 사이를 띄어쓰기 시작했다. <캘서의 서>를 비롯한 이 시대 작품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 시대 필사 예술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뿐만 아니라 예술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