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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Mar 02. 2022

1인칭 편의점 점주 시점

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

샐러드 드레싱을 사기 위해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편의점에 들렀다. 문을 염과 동시에 딸랑-. 뒤이어 "어서 오세요!" 인사말이 들려왔다.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진열대를 살피며 목표물 수색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소스 코너가 따로 있었지만 불닭맛 소스나 스파게티 양념들만 보였다. 이어폰을 꽂고 통화 중인 알바생분께 부탁드렸다. 그분은 내가 좀 전에 서성였던 진열대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없는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없으니 나가야 한다. 그런데 문이 아닌 도시락과 줄김밥, 삼각김밥, 햄버거, 샌드위치, 핫바가 모여 있는 냉장 코너로 홀리듯이 향했다. 줄김밥을 들었다가 번뜩 이성을 되찾고 얌전히 내려놓았다. 머쓱하게 인사 후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내 오른손에 들린 까만 봉지 안에 든 소떡소떡 덕분이었다.


내게 편의점은 대학 시절 추억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다음 수업 시간 텀이 애매하게 남아 있거나, 학식 메뉴도 안 땡기고 근처 식당엔 다른 학생들로 바글거릴 때, 슬프지만 용돈이 바닥을 보일 때. 친구들과 자연스레 편의점으로 향했다. 누구는 달랑 핫바 하나, 누구는 정석대로 컵라면과 삼각김밥, 누구는 가격에 비해 알찬 도시락을 계산대 위에 차례로 올려 두었다. 삐빅-. 곧이어 뜨거운 물 붓는 소리와 전자레인지가 위잉 돌아가는 소리가 합쳐져 배고픔과 식욕을 증폭시켰다. 당시에 난 오모리 컵라면 시리즈를 가장 좋아했다. 가끔 술을 마실 땐 초록색 배경의 청양고추 컵라면을 안주 삼았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고는 시험 기간. 친구와 밤샘할 때면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동시에 배가 허함을 느꼈다. "편의점 가서 뭐 좀 사 올까?"란 말에 초콜릿, 컵라면, 과자 등을 잔뜩 쓸어 담아 온다. 이럴 때면 내가 이거 먹으려고 밤을 새우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거의 음식 이야기만 했지만 이외에도 손님 입장에서 편의점은 여러모로 든든해지는 장소다. 갑자기 비가 내릴 때나 무언갈 빠뜨렸을 때, 퇴근 후 간단히 맥주 한 잔 하고 싶을 때면 우린 서둘러 그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엔 온화한 불을 밝히고 지키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은 알바생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만, 간혹 진짜 주인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은 그 편의점 점주 입장에서 바라본 편의점 일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실 봉달호 작가는 전작 <매일 갑니다, 편의점>으로 친숙한 작가다. 지금 소개할 책에도 편의점에서 일어나는 웃픈 사건들이 손님과 뒤섞이며 연달아 등장한다. 하지만 그 사이 편의점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코로나19가 한국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세상도, 편의점도, 편의점 주인도, 손님도 혼란스러웠던 시기. 그러니 전작보다 조금 덜 웃기고 조금 더 슬픈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는 자신의 9년 차 편의점 경력을 믿고 있었다. 메르스처럼 한 때라는 생각으로 능숙하게 마스크와 손 소독제, 물 티슈 재고를 늘렸다. 실제로 잘 팔리기도 했다. 그런데 찰나였다. 얼마 뒤 품귀 현상으로 발주가 중단되면서 점주 본인도 쓸 마스크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러 회사가 모여 있는 건물 지하 1층에 위치한 편의점은 확진자가 생길 때마다 동선 파악이 완료될 때까지 문을 닫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재택근무를 도입하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기기 시작했다. 평균 매출의 반의 반토막이 났다. 쌓여 가는 폐기물들을 보는 편의점 점장의 텁텁한 마음을 보상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사정을 보며 자영업자 분들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건너오셨을지 짐작이 갔다. 모두 고생 많으셨다.


물론 마음 뻐근해지는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인류애가 샘솟고 절로 미소 짓게 되는 장면도 종종 있다.

편의점에 들어올 때부터 어째 조마조마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 밀고 당기고, 붙거니 쫓거니. 그러더니 결국 일을 치고 말았다. 큰 애가 작은 애를 밀쳤는데, 작은 애가 튕기듯 날아가, 시식대에서 라면을 드시고 계시던 손님과 부딪힌 것이다. 야, 이 녀석들아, 얌전히 있지 못해! 화를 내며 계산대에서 나가려던 찰나, 손님의 행동이 멈칫 나를 가두었다.
"얘, 괜찮니?"
손님은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그것부터 물었다. 기억에 돋을새김처럼 지워지지 않는 풍경이다.

코로나19로 원래도 좋지 않았던 경기가 더욱 악화되면서 사람들은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몇십만 원 주는 재난지원금을 받고 못 받는 상황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확진자 한 명 때문에 주변 상권까지 무너지면서 해당 피해 가게는 억울하게 주변 식당 주인들의 눈치만 살핀다.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으니,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이토록 사람들이 이기적이었나"하는 생각에 혀가 쓰다. 하지만 이런 건조해진 일상 사이사이, 위와 같은 배려 있고 따뜻한 사람들이 있어 가끔이라도 촉촉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읽다 보면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편의점 지식(줄여서 알쓸신편)'도 알아간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손님 가운데 상당수가 음료수를 사려고 편의점에 온다. 그렇다면 입구 근처에 냉장고가 있으면 (손님 입장에서) 편리할 텐데 무엇하러 '가장 먼 곳'에 냉장고를 두는 걸까? 왜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음료수 사러 안쪽에 들어간 김에 과자는 어떠세요? 껌은? 사탕은? 담배는? 젤리도 당기지 않나요? 배고프진 않으세요? 졸리거나 기력이 없진 않나요? 수다스럽게 유혹하기 위해 그런다. 그 짧은 거리에 뭘 얻겠다고 그러느냐 싶겠지만, 그런 것이 장사다.

손님 입장에선 다소 얄밉게 느껴지지만, 자본주의 세상에선 당연한 이치다. 이외에도 편의점을 차릴 의향이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운영 방식과 노하우가 곳곳에 들어 있다. 단순히 다른 일보다 편해 보여서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따끔한 충고도 아까지 않는다. 역시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은 점주가 코로나19 시대에 편의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과 가족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버텨내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투영해 보여준다. 조금은 가볍게 읽어볼 심산이었는데, 마음에 묵직한 무언가가 남는다. 약 1년 뒤 지금, 오미크론의 확산으로 누적 확진자 300만 명을 넘어섰다. 다행히 숫자에 비해 증상이 심하진 않지만, 이제 예전처럼 함부로 예측할 수가 없다. 심지어 최근에 발생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 세계가 휘청거리고 있다. 일상을 지키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 요즘, 그럼에도 놓아버리지 않는 모든 분들을 존경한다.




p. 7

편의점을 운영하며 내내 '지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지킨다'고 하면 고집스레 끌어안고 억척스레 내주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막 소유욕이 생겨 뭐든 "내 거야, 내 거야"하며 떼 쓰는 아이처럼. 물론 그것도 지키는 일일 테지만, 또 하나의 지킴이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그러니까 지킴이란 나만의 욕심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서 비롯되는 무엇 아닐까.


p. 65

손님이 다양한 만큼 알바도 다양하다. 다양한 문제를 풀어봐야 시험을 잘 치르는 것처럼 사람도 다양한 유형을 겪고 복작여봐야 생각의 두께가 두터워지는 것일까.


p. 196-197

플러스가 어느새 마이너스 되고, 마이너스는 언제 또 불쑥 플러스가 될지 모르는 인생이다. 그래서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며 "오늘 잠깐 잘나간다고 어깨에 힘주면서 지나치게 으스댈 필요 없고, 뭐가 좀 안 풀린다고 기죽어 고개 떨굴 이유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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