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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May 02. 2021

차가운 현실에서 간절히 도망치고 싶을 때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그런 날이 있다. 사소하든, 중대하든 간에 내 손을 탔던 모든 일의 결과가 엉망으로 나타날 때, 그래서 몸과 마음이 이를 도저히 감당해내지 못할 때. 혹은 이상적인 답은 정해져 있는데, 냉정한 현실로 인해 나는 저만치 아래에 있는 플랜 D를 마지못해 택해야 하는 순간. 한 마디로 외부적인 조건으로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날. 세상은 왜 이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원망 가득한 눈초리를 허공에 보낸다. 이럴 땐 꿈에서라도 좋은 일이 생겼으면.


 사실 외적으로만 아이 티를 벗어난 뒤부터, 자면서 꿈을 꾸는 날이 부쩍 줄었다. 학생 땐 부족한 수면 시간 탓에 정말 잠만 자기 바빠서, 사회인이 된 요즘엔 너무나 규칙적이고 쳇바퀴 같은 일상으로 꿈에 나올만한 소재가 없어서가 나름의 이유랄까. 어릴 땐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다 다리가 공중에 붕 뜨는 더러운 기분도 만끽하고(엄마는 그게 키 크는 꿈이라 말씀하셨는데, 나는 찔끔찔끔 길어지다 결국 158.X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때론 무서운 형상이 나를 쫓아오는데, 정작 내 발은 너무 무거워 달아날 수 없는 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 엄마의 오래된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고 다시 잠든 적도 있었다. 물리적인 성인이 된 후부턴 이런 스펙터클한 꿈보단 현실에 근접한 꿈을 간혹 꾼다. 예를 들면, 대학교 시험 전날 시험을 망치는 꿈이라던가(상당히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그 꿈을 꿀 때마다 만족스러운 성적이 나왔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순간 깨버리는 더러운 꿈이라던가. 음, 왜 기억에 남는 꿈이 다 저런 거지?


 어쨌든 현재에 단 일초라도 머무르고 싶지 않은 날, 지금의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어떻게든 잠을 청해 본다. 하지만 꿈 자체도 잘 꾸지 않는 요즘, 원하는 꿈을 꿀 수 있을 리가. 그래서 무작정 서점에 들러 꿈같은 현실감 제로의,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는 책을 찾기 위해 소설 매대로 향했다. 그런데, 진짜 있었다. 그것도 진짜 꿈을 다룬 이야기가. 말해 뭐해, 당장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 재빨리 카드를 내밀었다.




 이야기는 주인공 페니의 면접 준비로 시작된다. 면접 장소는 달러구트가 운영하는 꿈 백화점이다. 백화점에는 1층에서부터 5층까지 다양한 종류의 꿈을 판매하고 있다. 잠이 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쪽 세상에서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 잠옷을 입고, 혹은 속옷만 입은 채(이분들은 알몸으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녹틸루카라는 캐릭터가 수면용 가운을 재빨리 입혀 준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으로 향한다. 그리고 원하는 꿈을 판매하는 층으로 가 각 층에 있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꿈 상품을 사 간다. 그리고 그에 따른 대가는 후불제로 지불한다. 그 꿈이 만족스러웠다면 좋은 값을 치르고, 꿈이 무용지물이었다면 아무런 값을 받지 못한다. 오로지 꿈꾸는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이렇듯 손님이 킹왕짱인 꿈 백화점에 페니는 주인공 버프를 쓰며 멋지게 입사한다. 그녀가 입사한 후 1년 간의 백화점 이야기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꿈을 만들어내는 5명의 멋진 꿈 제작자들, 그 상품들을 손님들에게 좋은 의도를 가지고 판매하는 달러구트와 그의 꿈 백화점 직원들, 그리고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꿈을 사 가는 잠든 손님들.


 꿈 백화점을 찾는 손님들은 원하는 꿈 상품이 다양한 만큼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있다. 짝사랑을 끝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혹은 노력에 비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원하는 이들,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보고 싶어 하는 손님들, 연인 또는 가족과 이별해 이들을 그리워하거나 반대로 남겨진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 하는 죽은 자들까지. 이 중 돌아가신 할머니가 훗날 잘 자라준 손주에게 보내는 꿈 이야기가 가장 따스했고 울컥했던 순간이었다. 결국 이들은 모두 더 나은 현실을 맞이하기 위해 꿈을 꾸러 간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읽으면서 자주 '해리포터'가 떠올랐다. 바로 내용 곳곳에 숨겨진 엄청난 디테일 때문이다. 나는 꿈 백화점이 사람들이 잠들기 시작하는 밤에 오픈하는 줄 알았는데, 낮잠을 자는 손님들도 있어 하루의 대부분이 영업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작가의 세심함에 한 번 놀랐으며,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도 꿈을 꾸기 때문에 동물들의 꿈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꿈 제작자가 따로 있다는 귀엽고 따스한 이야기에 두 번 놀랐다. 그 외에 다양한 소름 돋는 반전들까지 포함하면 세 번. 이런 짜임새 있는 환상에 판타지 소설이 마냥 터무니없이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가 어쩌면 어딘가에 실존할지 모른다고 믿고 싶은 것처럼, 내가 그동안 꿨던 모든 꿈들이 실은 잠든 세상 속 꿈 백화점에서 내가 직접 고른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길 바란다.


 이렇게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어색함 없는 스토리 전개와 해피엔딩이 예견된 이야기 속 틈틈이 마음이 저릿해지는 감동적이고 따스한 순간을 만끽하고 싶다면, 지금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문을 활짝 열어 보기를 추천한다. 꿈 제작자들과 그 꿈을 판매하는 백화점 직원들, 그리고 그 상품을 구입하는 잠든 손님들과의 평화로운 하모니가 이 책을 읽는 여러분에게 들릴 것이다. 모두 좋은 꿈 꾸길 바란다.



p. 31-32

 "저는 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이 질문을 떠올려요. '사람은 왜 잠을 자고 꿈을 꾸는가?' 그건 바로,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리석기 때문이에요. 첫 번째 제자처럼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든, 두 번째 제자처럼 과거에만 연연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신은 세 번째 제자에게 잠든 시간을 맡겨서 그들을 돕게 한 거예요. 왜, 푹 자는 것만으로도 어제의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고, 오늘을 살아갈 힘이 생길 때가 있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꿈을 꾸지 않고 푹 자든, 여기 이 백화점에서 파는 좋은 꿈을 꾸든, 저마다 잠든 시간을 이용해서 어제를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잠든 시간도 더는 쓸모없는 시간이 아니게 되죠."


p. 114

 "다들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궁금해하시던데 손님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인가요?"

 (......)

 "목적지요? 사람은 최종 목적지만 보고 달리는 자율 주행 자동차 따위가 아니잖아요. 직접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고 가끔 브레이크를 걸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제 맛이죠. 유명 작가가 되는 게 전부가 아닌걸요. 전 시나리오를 쓰면서 사는 게 좋아요. 그러다가 해안가에 도착하든 사막에 도착하든 그건 그때 가서 납득하겠죠."


p. 215

 "모두가 제 꿈을 꾸고 극한의 자유를 느꼈다는 찬사를 보낼 때, 어린 저는 자유의 불완전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꿈에서는 걷고 뛰고 날수도 있는 저는, 꿈에서 깨어나면 그러지 못합니다. 바다를 누비는 범고래는 땅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바다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정도와 형태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생명은 제한된 자유를 누립니다."



 안녕하세요. 글고운입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글은 어제 완성했음에도 이동 중이라 업로드가 10분 정도 늦어져 죄송합니다(꾸벅). 이전 작품과 동일하게 매주 일요일 7시에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찾아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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