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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May 09. 2021

가벼움과 무거움 때론 그 사이 어딘가

쓸 만한 인간-박정민

 내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박정민이다. 그의 글을 읽고 난 후, 동생의 마음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영화 '동주'에서였다. 한때 윤동주 시인에게 빠져 있던 내가 보면서 많이 울었던 영화다. 그런데 거기서 주인공 못지않게 큰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시인 윤동주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송몽규 열사다. 그리고 그 역사적 인물을 연기한 사람이 바로 박정민 배우다. 많은 사람들의 말마따나 윤동주 시인의 삶을 보려다 송몽규 열사란 인물에 대해 궁금해지게 만든 배우. 그의 연기력은 진실했고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나에게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라는 인상을 남기고 그 인상이 오랜 시간이 지나며 차츰 희미해져 갈 즈음, '쓸 만한 인간'을 읽게 되었다.

거기엔 그가 지금의 좋은 배우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300여 페이지에 걸쳐 잘 축약되어 있다. 그는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의 말로 독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그럴듯한 문장과 서사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래도 읽어보시겠다면,
그저, 무심결에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이미 그의 그럴듯한 문장이 마음에 들어, 나는 계속해서 다음 장을 넘기다 무심결에 읽은 문장에 소리 내서 웃기도 하고 때론 진지한 글귀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쓸 만한 인간'은 가벼움과 무거움을 자유자재로 드나들었고 그 사이 어딘가를 서성이기도 했다. 가벼울 땐 한없이 가벼웠다(욕하는 건 절대 아니다). 솔직히 초반엔 병맛 분위기가 느껴지는 걸 숨길 수 없었다. 좋게 말하면 해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개웃겼다(실제로 책에서 나온 말이다). 궁금하실 것 같으니 얼른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여기 분위기가 왜 이럽니까. 놀자 놀자 뿌우."라고 했고, "정민아, 술 취했으면 들어가."라고 한 여자 선배가 말했고, "스크린쿼터가 뭔데요. 난 그런 거 몰라요. 놀자 놀자 뿌우."라고 되받아쳤다가, 한 남자 선배한테 얻어맞을 뻔한 걸 그 여자 선배가 구해줬다.


"이건 착취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판매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를 지급할 건데요?"
"착취해주세요."


'원고 정재영, 피고 박정민, 7만 원에 무너진 모자지간'
'법정에 선 13세 소년, 과연 뭐가 될 것인가'
'절도 소년 박 모 씨 동생, "그 새끼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 입장 표명'

등의 헤드라인을 떠올리니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렇게 그의 가벼움에 웃음으로 허우적대다 보면 갑자기 묵직한 느낌을 주는 진중한 모습의 그를 만나게 된다. 그자신의 업적을 재미로 겸손히 표현했지만 사실 대단한 모범생이었다(읽다 보면 가끔 배신감이 들기도 한다). 그는 배우가 되기 전 명문 고등학교인 한일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연기를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이를 내려놓고 또 다른 명문대인 한국예술 종합학교에 재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배우란 직업을 위해 모든 걸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극단의 무대 위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나날을 무대 뒤에서 온갖 일을 하며 보내 연기의 꿈에 조금씩 다가간다. 그러다 2011년, 윤성현 감독의 독립 영화 '파수꾼'에 주연으로 발탁되며 첫 데뷔작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그는 이후 <전설의 주먹>, <들개>, <동주>, <그것만이 내 세상>, <변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의 작품에서 조연으로, 혹은 주연으로 꾸준히 출연하며 연기의 입지를 착실히 다져나간다.


 그는 시상식에서 박수를 정말 성실히 쳐주는 배우였다.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도 그의 능숙한 박수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정민이란 이름 석 자가 들려왔다. 그는 연기 부문 첫 상인 '남자신인연기상'을 받게 되었다. 노력의 결과가 가장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박수를 당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는 이 상을 시작으로, 이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신인남우상', '남우조연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에서 '남우조연상'을 받게 된다.


가끔씩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상이 그 순간을 조금은 뒤로 미룰 수 있을 것도 같다.


 노력의 천재들이 성공하는 과정이 으레 그렇듯, 박정민 배우에게도 돌부리가 존재했다. 그에게도 결핍이 있었고 이로 인해 강박증이 생겼다(자세한 이야기는 책에서 마주하길 바란다). 나도 어린 시절의 결핍으로 강박증이 있다. 다양한 곳에서 완벽함을 추구한다. 나는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데, 필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문단의 첫 문장은 무조건 3번 이상을 반복해서 읽는다. 이해가 되든, 되지 않든 말이다. 완벽하게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힘들어한다. 그리고 지속하기 힘들 것 같거나 완벽한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적으면 열정을 쏟기 어렵다. 그래서 무기력함이 종종 찾아온다. 하지만 박정민 배우가 이로 인해 좋은 점을 발견했듯, 나 또한 완벽주의적인 성격 덕분에 좋아하는 일에서만큼은 꾸준한 노력과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히 임했다. 때론 결핍이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가벼움과 무거움 그 사이 어디쯤의 삶. 책에선 그것이 여행이라 느껴졌다. '아니, 여행은 당연히 가벼움에 속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여기서만큼은 여행에서 박정민이라는 사람의 삶 자체라 느껴졌다. 그는 출연했던 작품이 완성되면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를 벗어놓고 자신의 본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장기간의 여행을 떠났다. 여행도 길어지만 삶이 되는 법이다. 박정민은 오사카, 홍콩, 페루 등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어딘가에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있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쓸 만한 인간'은 우리 대다수의 모습을 담아냈다. "지금 우릴 고려대 자퇴하고 한예종 입학한 사람이랑 비슷한 위치에 놓는 거야?" 조금 진정하시길 바란다. 우리도 종종 멍청한 행동과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론 학업에 상관없이 신중하고 깊이 있는 면모들도 드러내지 않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고, 찌질함과 멋짐이 공존하고 있다. 배우 박정민은 그래서 참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든, 가족의 꿈을 위해 열심히 현재에 충실하든 간에 우리 모두 중요하고 쓸 만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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