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디와 아름다움으로 포장한 지극히 철학적이고 신화적인 드라마
이름도 이상한 고등학교 스리고의 여고생 '은단오'는 어느날 온 세상이 불편해짐을 느낀다.
불편한 '나'는 내가 사랑을 부르짖는 교내 꽃미남 그룹의 멤버 '백경'에게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있고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손목의 심장박동센서는 그 시절 누군가 한번쯤은 가지고 싶었던 병약한 소녀의 레퍼런스를 보여주고 있으며 거기다가 집은 엄청난 대저택에 정원이 있는 부잣집 딸이라니...!
그렇게 의심의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마치 운명에 이끌리는 것처럼 '진미채요정' 이라는 의문의 남자에게 '이 세상이 '만화속 세상'이며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자신들은 '만화속 캐릭터' 그리고 은단오가 불편해하는 상황은 '스테이지' 그리고 마음대로 할수 있는 상황은 '쉐도우' 이며 거기다가 은단오는 이 만화속의 가련한 '여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 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며 드라마는 재밌게 흘러간다.
가만보자...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우리(시청자)는 정말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방송 3사를 넘어 수백개의 티비채널과 그리고 전세계를 넘나드는 OTT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지만 우리가 그 이야기를 인지하고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1)핍진성이라는 게 필요하다.
*1)핍진성이란 용어는 라틴어 ‘verum(진실, truth)’과 ‘similis(유사한, similar)’에서 나온 말로, 박진감(迫眞感), 현실감, 유사 진실성, 진실다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개연성(蓋然性)이라는 용어와 혼용되기도 한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에게 문학에서의 핍진성과 자연화는 동일한 맥락을 지니는 개념인데, 자연화는 서사물의 생산이나 수용이 이루어지는 관습적 토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자체가 의식되지 않은 채 서사물의 생산자나 수용자의 의식 속에 가능한 것, 혹은 있을 법한 것으로 가능해지는 것을 일컫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핍진성 [verisimilitude, 逼眞性] (상담학 사전, 2016. 01. 15.,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내가 만화속주인공이라니...!'라는 허구성이 돋보이는 드라마인데 이상하게도 이걸 보는 나(글쓴이)는 보면 볼수록 이 드라마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종영한지 몇년 된 시점에)
어쩌다 발견한 하루 (이하 어하루) 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핍진성이 매우 높은 드라마라고 단언할수 있다.
"아니? 만화속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스테이지'니 '쉐도우'에다가 전생까지 들먹이는 드라마가 어찌 핍진성이 높다고 할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지만 차근히 한번 풀어보려고 한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고등학교 시절을 한번 떠올려보자.
특히 '고등학교 2학년'을 한번 곱씹어보기 보면 그 시기는 어른의 경계에 거의 다가선 시기적 상태이다.
가족을 중심으로 나의 체계가 움직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 우정이라는 감정으로 친구들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 기쁨을 마음과 몸으로 느껴 내 자신을 성장시키는 시기가 바로 '고등학교 2학년' 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기는 어른으로 나아가기 위한 생각의 형성이 시작되며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교과서적인 문장으로 나열하는 게 좋을듯한 '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화학작용들이 그 아이를 어른으로 성장시킨다.
어하루 속에서는 '스테이지'와 '쉐도우'로 나타냈고 '만화속' 이라는 내러티브를 부여했지만 사실 그런 내러티브는 어하루 속의 장치일 뿐이지 어하루 '비밀'속 은단오의 모습은 지극히 모두의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을 표현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앞으로 뭘 할것인가?, 이대로 죽을수는 없다.... 등등 보다 철학적이고 복잡한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게 바로 '열 여덟'이라는 숭고한 나이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열 여덟의 순간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랑' 이다.
사랑이 "우리 몇월 몇일날 만나서 사랑에 빠지자"하고 예약하고 오는 것이 사랑이겠는가, 사랑은 볕이 잘드는 자리에 햇빛이 쏟아지며 찾아오는 것이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오늘 하루 만나서 빠지는 것도 사랑이며, 몇 년 혹은 몇십년 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은 순간을 예상할수 없는 것 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하지만 열 여덟의 순간에 찾아오는 화학적인 호르몬 (용광로) 처럼 솟아오르는 사랑은 다르다.
그 전까지는 느낄수 없었던 '희생' 이라는 감정이 처음 생겨나는 시기, '널 위해서는 죽을수 있어' 라는 고귀한 희생의 가치가 동시에 생기는 것이다.
그 전까지의 사랑은 부모가 주는 사랑, 우정으로 소통되는 사랑의 행위 였다면 첫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은 '나를 놓고 너를 들어올리는' 상황, 어하루에서 은단오가 죽음을 감수하고도 하루에게 그 '사랑의 기억' 만으로도 생을 떠날수 있는 서사는 충분히 '진정한 사랑'이라는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기에 알맞다.
어하루에서는 왜 등장인물들이 '자아'를 가지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고 인물들이 스테이지에서 작가가 정해준대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쉐도우에서 각자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만보여주며 '너도 자아가 생긴거야?' 라는 대사로 스토리를 이어간다.
나는 '자아'가 생기기 위한 절차를 나름 생각해보았는데 위의 첫번째 (고2) 와 두번째 (사랑)이 발현이 되어야 자아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첫번째의 '고등학교 2학년'을 조금 더 어렵게 풀어내보자면 *2)'자유의지'라고 불수 있다.
2)* 자유의지(自由意志, 영어: free will)는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능력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지는지, 부분적으로 가지는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인과 관계에서 인간 자유와 자연 법칙의 비중을 얼마로 볼 것인가와 관련돼 있다. (위키백과)
특히, 자유의지의 서양철학적 논의에서 두가지로 나뉘어 보자면 먼저 '결정론'
*결정론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인과적 결정론(causal determinism)은 미래가 현재까지의 사건들과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이다.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불리는 사고실험이 이것에 해당한다. 라플라스는 현재까지의 모든 사건과 자연 법칙에 대해 알고 있는 존재를 상상했다. 이것이 라플라스의 악마이다. 이 악마는 미래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논리적 결정론(logical determinism)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명제는 결국 참, 거짓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미래에 벌어질 행위의 참과 거짓은 현재에 결정된다고 가정할 때, 어떤 행위를 할지 선택하는 것은 자유로울 수 없다.
신학적 결정론은 신이 인간의 행위를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행위, 신념, 욕구가 유전자로 이미 정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들의 결정론은 서로 결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유전자와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결정론 등이 있다.
그 다음 '양립가능론'이 있는데 양립가능론은 '결정론과 양립가능론'이 동시에 이뤄질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양립가능론' 중에서의 '자기 원인을 이용한 논증' 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강한 결정론의 다른 증명 방법으로 '인과 사슬'(causal chain)이 있다. 여기에서 자유의지를 어떤 행동의 최초 원인으로 정의한다.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원인이 되는 존재(causa sui)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은 어느 행동을 할 때, 다른 사건이나 사실에 이유를 둔다. 사람은 자기 행동의 궁극적 원인(causa sui)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은 자유의지가 없다. 이 증명 방법도 비판을 받았다. (위키백과)
이처럼 어하루에서 자아가 생기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유의지'가 바탕이 되어야 되며 뒤이은 '사랑' 이라는 감정이 발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다.
*3) 불교경전인 《유교경》에는 "세상은 모두 덧없는 것이니 만나면 반드시 이별이 있다(世皆無常, 會必有離)."라고 하였고, 《열반경(涅盤經)》에는 "흥성함이 있으면 반드시 쇠퇴함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夫盛必有衰, 合會有別離)."라는 말이 나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회자정리 거자필반 [會者定離 去者必返]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4)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는 이 용어의 일상적인 용법에 비해 상당히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철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윤회의 작동원리이자 그것의 원동력이 되는 '덕(업보)'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한 행위는 업보가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인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인간은 전생에서 지은 죄에 따라 내생의 외모나 고난 등이 결정되는데 이것이 곧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반면에 현생에서 참회하고 덕을 쌓아 업을 없앤다면 그 또한 인과응보에 따라 해탈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절제함과 동시에 늘 선한 일을 하여야 하며 또한 자기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인과응보는 불교윤리의 기본이 되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4)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사필귀정)
어하루 리뷰를 하는데 왜 서양철학부터 불교경전까지 들먹이나 하겠지만 어하루는 굉장히 '철학적' 인 내용이 가득한 드라마라고 본인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하루에서는 본편인 '비밀'의 과거 만화인 '능소화' 와 연결된 세계관이며 비밀의 인물 들 중 몇 명은 비밀에서 엑스트라 (은단오, 하루, 백경, 진미채요정) 정도의 배경인물로 등장하지만 과거의 기억이 사라진 채 등장하거나 (은단오, 백경), 과거의 기억이 필연적인 요소로 남아있거나 (하루),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진미채요정) 역할이 있다.
이들에게 주어진 캐릭터에서 뻗어나오는 자유의지와 사랑은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일으킨다.
1. 과거의 업보(카르마)와 현재의 자신에서 길을 잃어버림 (백경)의 경우
전지적인 작가가 만들어놓은 (운명이 던져놓은) 것에 자신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순응하여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하루의 혁명 (스토리를 바꾸어 은단오를 해방시키려는)과 은단오의 자유의지에 감명을 받게되면서 자아가 생긴 후 은단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6)'자기희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5)성불하게 된다.
*5)*여기서 성불은 능소화의 배경이 마치 고려시대 같다는 생각에서 해보았다.
*5)*성불
깨달음에 이르러 부처가 되는 것.
성도(成道) 또는 작불(作佛)이라고도 한다. 석가는 6년간의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석가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우주의 진리로서 있어왔고 석가는 그것을 얻었기에 부처가 된 것이라 하였다.
그뒤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성품, 즉 불성(佛性)이 있음을 인정하였고 성불은 수행의 궁극 목표가 되었다. 즉 수행을 통하면 각자의 내부에 닫혀진 불성이 발현되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불 [成佛]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6)*자기희생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받고 십자가를 지읜것은 기독교 교리에서 매우 중요하다.
영화 '콘스탄틴'에서도 주인공이 사탄에게서 아이러니하게 벗어나는 방법이 바로 '신에게 자신을 재물로 바 치는 행위 (sacrifice)' 이다.
2. 과거의 업보를 딛고 사랑을 이루려 함 (은단오, 하루)의 경우
과거작 능소화에서 이룰수 없는 사랑을 쉐도우에서 나누었지만 결국 하루의 칼로 은단오를 죽였다. (백경이 하루가 쥐고 있는 칼을 들이밀어 은단오를 죽게 만들었지만 카르마에서 말하는 행위를 기준으로 하면 모두에게 업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수 있다.)
여기서 하루는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개척하려는 행위를 하고 사랑을 쟁취하려는 '신에게 반하는 행위'를 하려고 한다 (여기서 '신'은 작가라고 할수도 있으며 스테이지의 '신') 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하지만 쉐도우에서 등장하는 검은 블랙홀, 마치 쉐도우의 '신'이라고 생각하기 좋은 이 블랙홀은 항상 전지적으로 하루를 이끌고 나아가게 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7)'아키텍트' 같은 존재같다고 생각한다.
매트릭스의 네오와 비교를 해보자면 '쉐도우의 신'이 일부러 만들어낸 '불안정' 이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이처럼 어하루에서 자유의지는 결과로 은단오와 하루를 다음 작가의 만화에서 그 둘을 자유로 이끌었다.
이 두사람은 더이상 스테이지에 속박되지 않고 쉐도우에서 사랑을 이루게 되는 진정한 혁명을 이룬것이다.
*7)'아키텍트
매트릭스의 공동 창조주이자 관리자다. 즉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그램. 매트릭스, 요원을 비롯한 거대하고도 복잡한 프로그램을 짜는 것은 물론이고, 리셋과 통제 및 감시 같은 관리자 역할까지 하는 걸 보면 슈퍼유저 역할도 하는 듯하다. 다만 처음 시작은 단순히 방정식의 해를 찾는 수학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아키텍트가 두 번의 실패를 겪은 후,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고자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아키텍트의 실패는 바로 인류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아키텍트와 오라클은 힘을 합쳐서 세 번째 매트릭스를 만들었다. 해당 매트릭스는 인류에게 무의식적으로라도 선택권을 제공했고, 99%의 인류는 선택권에 만족하여 자발적으로 매트릭스를 택하고 기계들의 통제 하에 놓였다. 하지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었으니, 남은 1%의 인류가 매트릭스를 거부하고 기계들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이 저항자들, 즉 시온은 방치되면 언젠가는 매트릭스를 붕괴시킬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출처 : 나무위키 '아키텍트'
*8)'자아'
현대철학에 있어, 자아의 문제는 이러한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관점보다 오히려 윤리적 ·인간학적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사르트르는 그의 철학 논문 <자아의 초월>(1934)에서 모든 표상에 ‘나는 생각한다’가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 칸트적인 선험적 자아를 부인하면서 《존재와 무(無)》(1943)에서는 ‘나’의 존재가 타자(他者)에 의하여 근저로부터 위협받고 있음에 언급하고, 자아는 그 존재의 근저에 있어 대타적(對他的) 존재라고 주장한다. 또한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너’라고 부르는 타자(他者)와의 만남과 응답에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자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아 [ego, 自我]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자아 (ego)의 증명은 다양한 철학가들에게 다양한 의미의 해석으로 다가가고 있다.
어하루에서의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자아'가 생겼다 라는 말은 진미채요정이 말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이야기 일수도 있겠지만 저 위에 8번의 각주의 부버의 말처럼 '나와 너의 관계' 와 '너'라고 부르는 타자와의 만남과 응답이 중요한 요소라고 나는 생각된다.
만남과 응답, 우리는 '인간세계'에 살고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의 반도체에서 일어나는 미시세계 보이지 않는 와이파이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는것을 당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은 그것을 '확인' 하고 있지 않다, 물론 전공을 하고 개발한 사람들은 그것의 '이론'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눈으로 볼수 없다.
'인간세계'는 인간의 감정과 육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인간적'이다, '사람이라면...' 이라는 말들은 어쩌면 우리가 제도와 문화적으로 세뇌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이를테면 인도에서 손으로 밥을 먹는것과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손으로 밥을 먹는 행위가 서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손으로 먹던 발로 먹던 우린 그 행위가 잘못된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정해놓은 인간적인 규칙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어하루에서는 내가 사는 곳이 만화속 세상이라던지 자아가 생기고 혹은 자아가 없던 그들에게 주어진 행위는 '사랑' 이라는 가장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행위를 하고 있으며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라는 것과 '너'라고 부르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나' 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는데 바로 위에서 언급한 '고등학교 2학년' 이라는 시기이다. 아내가 늘 아들에게 하는 말 중에 '어릴때는 혼나고도 또 금방 잊어먹어서 또 혼나' 라는 이야기 이다. 이처럼 어린이를 거쳐 소년, 청소년 시기를 지날때 우리는 '사회화'가 덜 된 모습을 보여지고 있다.
이것을 보면 '자아'란 어찌보면 인간 본연의 행동으로 움직이고 희생할수 있는 사랑의 단계에서 부터 자아가 생겼다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섣부른 결론일수도 있겠지만 사랑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자아를 찾을수 없게 된다.
어하루에서 마지막까지 오남주가 자아를 찾지 못하지만 여주다는 그런 오남주에게 그 자아가 없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할게 라는 '자아'가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나는 드라마를 볼 당시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도화의 마음과 오남주와의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어장관리를 보며 분노를 금치 못했는데 '자아'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해보니 저러한 행동은 인간 본연의 당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자아가 있는 행동과 없는 행동은 '인간세계에서 인간이 정해놓은 룰' 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세계에서 룰이 없다고 하면 우린 아마 누구든 사랑하고 누구든 미워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아'의 시작이 곧 인간적인 호르몬에서 나오는 것이 시작이라고 하면 어하루에서 자아가 없는 캐릭터들은 그리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곧 자아가 발현되는 시기 (사랑의 시작)이 너의 노력이던 나의 노력이던 이루어질것 이다.
블랙홀 같은 것은 간절함이 만들어낸 영원일까 아니면 작가가 만들어낸 마치 워쇼스키스의 매트릭스 같은 것일까?
내 생각은 신화적인 소재에서 항상 등장하는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는게 어떨까 생각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믿을수 없는 일을 '기적' 이라고 하는것 처럼 스테이지의 신이 '작가' 라고 한다면 쉐도우의 '신'은 마치 검은 블랙홀 같은 전지적인 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인것이다.
특히 300년 된 나무 앞에서 백경과 은단오의 스테이지를 백경이 희생하여 하루와 은단오의 스테이지로 바꾸어버린 장면에서 세계가 파괴되는 것을 마치 소멸된 별이 블랙홀이 집어삼키는 장면으로 보여준 것은 그리고 하루가 은단오에게 선물로 준 '사라져 버릴 암막커튼의 별' 처럼...
어하루는 이러한 우주 *9) 삼라만상의 그리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라는 *10) 운명론 적인 이야기에서 벌어지는 신화 같은 이야기 인것이다.
*9) 삼라만상
넓게 펴져 있는 숲(삼라)처럼 온갖 사물들이 빼곡히 퍼져있는(만상) 것이다. 동의어로는 만휘군상(萬彙群象)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만물들이 있는 상황을 나타내며, 더 나아가면 모든 것(현상, 진리, 세계, 우주)을 나타낸다. 영어로 나타내자면 "All"과 의미가 비슷하면서 한편으론 조금 다르다. 그와 동시에, 삼라만상은 우주 안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뜻한다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삼라만상'
*10) 운명론
운명에 관해서 철학적인 형태로 논술된 것으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몇몇 단편(斷片)이 남아 있다. 또한 그리스 말기의 에피쿠로스파나 스토아파 철학자들이 운명에 관해서 꽤 활발한 논의를 한 듯한데 전자가 운명은 맹목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역설한 데 비해, 후자는 오히려 만물은 어떤 절대적 이성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 운명의 필연성에 복종할 것을 권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중세 이후의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형성된 사상으로서는 아우구스티누스 및 캘빈의 예정설(豫定說)을 들 수 있다. 이 사상은 사도 바울로의 서간에 그 원천을 두고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신이 미리 정했으며 신의 의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같은 견해에 근거를 두고 의지의 자유는 제1의 인간, 즉 아담에게만 해당될 뿐, 그 이후의 인간들에게는 선(善)을 행할 자유가 아니라, 다만 악을 행할 자유(원죄)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명론 [fatalism, 運命論]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사실 우리 인생이 스테이지라는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회사 등 각각의 스테이지에 맞게 등장인물은 있으며 일과가 끝나면 우린 집이라는 공간(쉐도우)에서 하루를 끝마친다, 또한 때에 따라 그 시절의 등장인물은 퇴장하기도 새롭게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10년전의 나, 10년 후의 나는 확연히 다른 주인공일것이다.
이런 경우가 있다, 몇십년만에 만난 사람은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를 사랑해줬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어느덧 새롭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흐름을 따라 소멸을 향해 가고 있지만 현재의 우리는 그 자체를 인식하고 있지 않다.
분명 끝이 있는 이야기 인데도 우리는 소멸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우리는 '인간' 이다, 인간은 호르몬이라는 신체의 화학반응으로 희와 비를 느끼며 살아간다.
100억을 준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 100억을 준다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인한 경지는 가질수 없다. 한낱 돈으로 가질수 있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수단을 구매할수 밖에 없다.
인간은 집단의 동물이기에 집단에 집착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희생하는 '희생'과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수 있는 '부처'의 가르침 같은 것은 매트릭스 안에서 깨부수고 나가는 1%의 인간이 마주하는 '시온' 이라는 진짜 세계와 다를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뭐 결론을 말하자면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작가와 만화, 등장인물로 나누었지만 우리네 인생에 대입해보면 작가는 신앙, 만화는 시간, 등장인물은 우리 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1. 어하루는 고등학교 2학년 (사랑이라는 호르몬의 생성) 시기의 자유의지와 에고(ego)에 대한 이야기
2.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가 섞여진 매력적인 이야기
3. 스테이지는 우리 모두에게 존재한다, 두가지를 기억하라 (카르페디엠, 범사에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