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때 가장 많이 나왔던 시험문제는 "~을 '증명'하시오."란 문제였다. 옛날 옛적 세계적인 경제학자분들께서 이미 발견하고 증명까지 다 마쳐놓으신 위대한 공식들을 학생들 보고 수식으로 증명하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건 이미 책에 다 나와있는 증명식, 증명 과정들을 달달 외워서 답안지에 그대로 써서 제출하면 증명 끝이다. 그렇게 하면 증명을 아주 잘했다며 아름다운 학점을 주신다.
시험문제 중에서 증명하라는 문제가 제일 싫었었는데, 사회도 자꾸 나에게 증명을 하라고 한다. 그 나이 먹고 지금까지 뭐 했느냐,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한다. '열심히 살아왔는지'라는 그간의 행동들로 볼 수 있는 것이지, 객관적인 자료로 볼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결국 열심히 살아온 '과정'으로는 증명이 안된다. (채점자에게 납득이 안된다.)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만 증명이 가능하다.
퇴근하고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밤 10시 즈음 시끄러운 고깃집, 술집들을 지나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문득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하늘을 보면서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 내 모습이, 마치 독서실에서 하루 종일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혼자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재수생 때의 내 모습과 똑같다고 느껴졌다. 변한 거라곤 겨우 겉모습뿐이었다. 스무 살 때 하던 고민들과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던 모습, 그건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별다를 게 없다. 그 십수 년의 시간 동안 쌓아온 많은 경험들과 추억들만 있을 뿐. 고된 하루를 마치고 혼자 밤늦게 집에 들어가던 그 수천 번의 시간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결과들'을 만들어 놓는 것뿐이다. 명문대학교 졸업장, 대기업 명함, 결혼, 내 명의로 된 집과 같은 눈에 잘 보이는 것들 말이다. 내가 그동안 이만큼 해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이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는 사회가 인정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걸 증명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이를 키우며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으면, 주변에서 "너 그 나이 먹도록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내 집 마련도 안 하고) 뭐 하고 살았어?!"라는 괴상한 질문에 맞닥뜨릴 일도 없다.
증명은 시험 볼 때나 하는 것이다. 시험은 증명 잘하면 성적장학금처럼 돈이라도 주지만, 현실에서는 증명 잘해도 아무것도 안 준다. 내 인생의 선택들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자고 내가 불편해질 필요가 없다. 굳이 내 인생 꽤 괜찮다고 보여주려 애쓰지 않아도, 내 인생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 하나씩 해나가느라 충분히 바쁘다. '증명 노동'을 안 해도 된다는 점에서 나답게 사는 것보다 나답게 살지 않는 것이 더 편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남에게 보이는 모습이 멋져 보이는 것보다 내가 보는 내 모습이 멋져 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