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똑같은 하루하루가 너무 지겨워서 몸이 꽈배기가 될 것 같다. 별일 없고 크게 아프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텐데 아주 배가 불러터졌나 보다. 그냥 문득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다. 이럴 땐 저절로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상상 속의 나는 모든 걸 정리하고 먼 나라의 시골마을로 떠나기로 한다. 푸릇푸릇한 녹지가 무성한 곳이면 좋겠다. 새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하고 하늘이 그림처럼 파랗고 예쁘면 좋겠다. 바다 바로 앞에 있는 집은 아니지만, 자전거 타고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깨끗한 바다도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 추운 겨울과 너무 더운 여름은 없는 곳이면 좋겠다. 제일 중요한 건 한국인은 한 명도 없어야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시골마을이면 딱 좋겠다.
그곳에서 나는 나이도 직업도 가족관계도 그 무엇도 밝힐 필요가 없다. 나는 그냥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나 일뿐이다. 노무사도 아니고 누구의 딸도 누구의 여자친구나 아내도,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 무엇을 전공하고 어느 대학을 나왔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해변 모래사장 그늘에 앉아 멍 때린다. 물에 들어가고 싶으면 그냥 그대로 들어간다. 스마트폰은 없다. 시계도 없다. 날이 밝으면 아침이겠거니, 날이 저물면 저녁이겠거니 하고 산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먹고, 자고, 싸는 거 외에는 안 한다고 큰일 나는 일은 없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가끔씩 마을 사람들과 간단한 대화는 하지만, 말은 최소한도로 줄인다. 대부분의 시간은 아무런 방해 없이 혼자 있는다. 가끔씩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때로 산책을 하거나 수영을 한다. 그것도 하고 싶을 때만 한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말소리나 자동차 소리는 없다. 새소리, 바람 소리, 빗소리, 나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런 상상을 할 때면 아주 평온한 모습이 그려진다.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전혀 심심해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든다. 현실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1년 정도는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 1년은 금방 가니까 2년도 괜찮을 거 같다.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저게 무슨 시간 낭비야!!!' 하면서 펄쩍 뛰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이렇게 살아보는 건 10년 이내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엄청나게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신경 써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성공한 사업가나 유명한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저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고, 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거나 유명해지는 것엔 관심이 전혀 없다. 이 작은 브런치 공간에서조차도 이렇게 필명 뒤에서 조용하게 글 쓰고 있지 않은가.
아등바등 살아온 것에 비해 이룬 것은 겨우 '에게..?' 할 정도이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계속 시도하고 부딪히고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뒤돌아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나는 늘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20대 때는 세상의 성공이란 기준에 맞춰 열심히 뛰었고, 30대는 '아이고, 속았네! 그냥 나 하고 싶은 거나하고 살자'하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못해봤던 것들을 열심히 해보았다. 스페인어 공부하기, 여행하기, 글쓰기, 꽃꽂이, 베이킹 등 배우기, 피아노 배우기, 수영, 러닝, 마라톤, 등산하기 등등. 물론 이렇게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즐기는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후회도 전혀 없다. 하지만 가끔은 '나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사회적 성공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도 '열심히' 했고, 하고 싶은 거 배우고 싶은 거 배우는 것조차도 '열심히' 했다. 물론 쫓기듯 조급해했던 예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지긴 했지만, '열심히 하는 버릇'이 없어지진 않았던 것이다.
혼자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더 처절하게 '온전한 혼자'이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보고 싶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