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의 순교로 외워보는 한자 臨(임할 림)
한국사 편(삼국시대)
(10)신라 법흥왕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하다(527년)
신라는 22대 지증왕 때부터 고대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자 다양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지방 행정 제도인 '주군 제도'를 정비했고, 중국의 앞선 문물을 배우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신라는 여전히 귀족의 힘에 비해 왕의 힘이 약한 나라였습니다. 아버지 지증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23대 왕이 된 법흥왕(재위 514~540)은 더욱더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법흥왕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으로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인 ‘병부’를 설치해 군사권을 장악했습니다. 다음으로 국왕 중심의 국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국가의 법인 ‘율령’을 반포했습니다. 또한 관료들의 등급을 정하는 ‘17관등제’를 정비하면서 관직의 등급에 따라 옷의 색깔이나 모양 등을 달리할 수 있도록 ‘공복’을 제정했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의 가문과 출신에 따라 직위를 주는 ‘골품제’도 정비했습니다.
하지만 법흥왕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왕권은 여전히 토착 신앙에 기반을 둔 6부 귀족들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신라는 여섯 개의 부족이 모여 나라를 이룬 국가이다 보니 각 부족 출신의 백성들과 이를 이끄는 귀족들이 건국 당시의 토착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각 부족의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후예라고 믿고 있는 토착 신앙 덕분에 6부 귀족들 또한 왕 못지않은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다 보니 국왕의 권위를 세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6부 귀족들은 각자 자신들의 군사를 따로 이끌 정도로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무턱대고 힘으로 억누르기도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법흥왕으로서는 6부 귀족들 편에 선 토착 신앙을 대신할 불교의 공인이 시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교 공인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은 예상보다도 훨씬 거셌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토착 신앙을 계속해서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충신 중 하나인 이차돈이 나서서 자신이 목숨을 바칠 테니 귀족들의 반대를 이겨 내고 불교를 공인하라 법흥왕에게 제안했습니다.
이차돈은 왕명을 핑계로 토속 신앙의 성지인 금성(지금의 경주) 천경림에 흥륜사라는 절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귀족들이 이를 항의하기 위해 궁궐로 몰려들자 법흥왕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며, 거짓으로 왕명을 들먹거린 죄로 이차돈의 목을 쳐서 처형하라 명했습니다. 주군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이차돈은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귀족들은 법흥왕이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가장 아끼던 신하마저 가차 없이 처형하자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봐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이차돈은 처형 직전 “부처가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기적)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사형 집행인의 칼이 이차돈의 목을 내리치자, 정말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잘린 이차돈의 목에서 붉은 피가 아닌, 흰색의 피가 솟구쳐 올랐던 것입니다. 게다가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땅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이차돈이 말한 대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신기한 광경에 궁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또 한 번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차돈의 잘린 머리가 도읍인 금성(지금의 경주) 북쪽에 있는 산자락으로 날아가더니, 머리가 떨어진 곳에서 무덤이 생겨난 것입니다.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자 6부 귀족들도 더 이상 불교 공인을 반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기적을 봐놓고도 부처의 힘을 부정한다면, 거짓을 들먹인 죄로 충신마저 베어버린 법흥왕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법흥왕이 강력한 개혁에 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끼던 신하인 이차돈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바쳐 일으킨 기적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입소문을 타면서 불교가 공인될 수 있게 했고, 왕이 신라 권력의 최고 정점에 군림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신라는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뒤 국법인 율령과 불법을 통해 강력한 국왕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게 됐습니다. ‘왕이 곧 부처’라는 불교의 ‘왕즉불’ 통치 철학은 국왕을 귀족 세력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신성한 권력을 지닌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한 신라였지만, 다른 나라들이 불교를 왕권 강화에만 이용하는 데 그치는 사이 신라는 불교를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백성들의 정신을 통일해 진정한 불교 국가로 거듭났습니다. ‘불교의 법을 흥하게 했다.’라는 뜻의 ‘법흥’이라는 시호부터가 '불교를 공인한 왕'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흥왕은 이후 거침없이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토속 신앙을 상실한 귀족들을 달래서 왕의 아래에 두기 위해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이라는 직책을 만들고 국왕이 직접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사부 장군 등을 활용한 정복 전쟁을 통해 금관가야를 정벌하여 신라 땅으로 완전히 흡수했습니다. 또한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신라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거듭났음을 대외에 과시했습니다.
이후 24대 진흥왕 때 창설되어 청년들에게 불교 정신과 무예를 가르쳤던 ‘화랑도’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는 원동력으로 혁혁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처럼 신라는 불교 덕분에 더욱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나올 한자를 익히는 법
앞서 나온 이야기를 요약한 문장 속에서 빨간 색깔로 표시된 글자를 순서대로 읽으면 우리가 배울 한자의 음과 훈이 됩니다. 문장 중간중간에 들어 있는 부속 한자들을 순서대로 모으면 우리가 배울 한자의 모습이 완성됩니다.
>>‘이차돈의 순교’로 외워보는 한자 : 臨(임할 림)
법흥왕이 강력한 개혁에 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끼던 신하(臣 신하 신)인 이차돈의 희생 때문이었다. 그가 목숨을 바쳐 일으킨 기적이 사람들(人 사람 인)의 입(口 입 구)에서 입(口 입 구)으로 전해지며 입소문(口 입 구)을 타면서 불교가 공인될 수 있게 했고, 왕이 신라 권력의 최고 정점에 군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예시) 君臨(군림), 臨時(임시), 臨機應變(임기응변), 臨戰無退(임전무퇴), 大韓民國臨時政府(대한민국임시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