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하고 싶은 일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좋겠어요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레 부딪혀버린 노래에 치여 순간 도로 한복판에 퍼져버린 차 마냥 뇌정지가 오는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수년 전 새벽 4시 반 퇴근길.
하루 죙일 편집실에 틀어박혀 모니터 화면이랑만 대화하다가 ‘씻고 딱 2시간만 자다 와야지’ 하며 올라탄 올림픽대로. 몸 상하고, 맘 상하고, 좋을 일 하나 없는 새벽 퇴근이지만 그래도 이 시간에 뻥 뚫린 도로를 내것마냥 독점하며 내달리는 기분은 꽤 나쁘지 않다. 모두가 잠든 이 도시의 소음을 다 흡수하고, 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묘한 일렁임이랄까(졸았단 거다).
‘아, 아까 그 원샷을 풀샷으로 바꾸고 하늘에 자막을 하나 박아야겠다. 그럼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 게 덜 어색할 듯. 내일 까먹지 말아야지. 기억할 수 있겠지? 졸려 죽겠네’
‘아참. 다음 촬영 소품 이거 추가해달라고 해야지. 분명 지난번에도 생각했었는데 또 못 가져가서는... 똥멍청이’
눈꺼풀은 저 앞에 보이는 덤프트럭 엉덩이만큼이나 무겁고, 뇌는 저 한강 위 안개처럼 뿌옇지만 이런 깨어있지도, 잠들어있지도 않은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은 평소에는 잘 생각해 내지 못했을 법한 꽤 중요한 것들이 많은 법이다. 문제는 내일 눈떠서도 기억하느냐 못하느냐겠지만. 그렇게 뇌 속 순환도로에 많은 차들이 스쳐 가는 찰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그날 넌 기억하니
예전에 우리 꿈을 나누던 그 밤의 놀이터를
마냥 하늘만 보며 결국 잘될 거라고 얘기했지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봤었고
뒤에선 누군가가 쫓아온 듯해
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해 넌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생각해 난
이제 그만 지겨워
- 치즈(CHEEZE) [어떻게 생각해] 中
뭐야. 이 밝고 해맑은 목소리에 그렇지 못한 가사는.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해... 그래, 나 지금 어떻게 생각해...?
당장 내일 시사할 그림 풀샷 바꾸는 거 말고, 당장 다음 촬영 소품 추가로 챙기는 거 말고.
어떻게 생각하냐고.
네 인생에 대해서.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이게 원하던 그림이야? 어떻게 생각해...?
쿵. 하고 가사에 치였다.
그렇게 혈액처럼 잘 돌던 뇌 속 순환도로에 교통사고가 났다.
그러니까. 나 지금 뭐 하고 살고있는 건데.
나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데. 새벽 이 시간에 이 많은 차들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건데.
지금 이 새벽 어스름몽롱 퇴근길. 어제도였잖아. 지난주에도, 지난달에도, 작년에도였잖아.
피곤하다, 지친다, 이제 더는 못 하겠다. 매번 반복하면서도,
그렇게 당장 눈앞에 놓인 숙제들만 해치우다가, 같은 퇴근만 반복하다가. 뭐 더 나아졌어? 살만해졌어? 아니, 행복해졌어?
그러니까 생각해야 해. 아니면 마흔에도, 쉰에도. 똑같이 이 새벽 퇴근길일 거야.
그렇게 ‘어떻게 생각해?’ ‘생각해야 해-’ ‘어떻게 생각해?’ ‘생각해야 해-’ 반복되는 가사를 따라 그 새벽의 이상한 온도, 습도, 질감에 홀려 내가 차를 운전하는지 차가 나를 운전하는지 모르겠는 순간, 올림픽대로에서 빠졌어야 할 마지막 구간을 놓쳐, 그대로 서울을 벗어나 청라국제도시 톨게이트까지 찍어버렸다. 분명 집 근처까지 다 왔었는데, 순식간에 노래 가사에 홀려서는 그 익숙한 퇴근길에서마저 정신 못 차리고는 인천공항 가는 고속도로를 타버린 것이다.
‘뭐야, 여긴 대체 어디야. 왜 수십km를 더 돌아야 하는 건데.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지?’ 불법 유턴을 해서라도 빨리 다시 집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견고한 벽으로 쭉 막혀있는 중앙차선 덕에 그 졸려 죽겠는 새벽 시간에 기름 낭비, 낭만 낭비하며 드라이브 제대로 했다. 평소 같으면 15분이면 도착했을 집을 그렇게 돌고 돌아 1시간 20분 만에 겨우 도착했으니. 슬슬 해는 떠오르고, 이제 출근길 정체가 시작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찌나 현타가 오던지. 진짜 지금 이 상황... 어떻게 생각해?
그날 그 청라 톨게이트가 꿈이 아니었다는 건, 며칠 뒤 날아온 속도위반 딱지가 증명해 줬다. 청라에서 다시 서울로 최단 거리를 검색해 돌아오는 도중,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어둑어둑한 강둑(?)을 공포심에 내달리며 무려 두 번이나 과속 카메라에 잡힌 것. 사람 하나, 차 한 대 안 다닐 것 같은 그 일방 통행길이 시속 30km 구간이었을 줄이야. 하긴 알았어도 무서워서 풀악셀 밟았을거다. 8만 원짜리(기름값, 톨비 제외) 이 비싼 심야 드라이브... 어떻게 생각해?
그때 그 노래 가사에 제대로 답을 내리지 못해서,
여전히 난 요즘에도 새벽 퇴근길을 달린다.
똑같이 당장 눈앞에 놓인 숙제들만 해치우다가, 같은 퇴근만 반복하다가.
더 살 만해지지도, 아니 행복해지지도 못한 채.
그러다가, 이번 주에도 또 노래 가사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무엇을 해야 할까
걱정은 하지 마요
항상 즐겁게 최선을 다하면
잘되어 왔잖아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좋겠어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불안해하지 말고 한 걸음씩
즐겁게 나아가줘요
- 멜로망스 [무엇을 해야 할까] 中
와. 무슨 라디오에서 주기적으로 신의 계시가 오냐.
요즘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이, '나 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 회사 일 말고, 진짜 궁극적으로 뭐 해 먹고 살아야 하냐'인데. 어떻게 알았지. 위에서 누가 나 보고 있나요?
근데, 좀 억울한 게 대전제가 틀렸어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래. 걱정을 하지 말라니. 걱정 안 해보도록 노력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기보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니.
전... 하고 싶은 게 없는데요...? 여기서부터 확 막혔는데 어떡하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을거에요’...?
아뇨? 전 진짜 모르겠어요. 이 질문에 답을 찾으려 최근 수년을 헤맸는데, 아직도 못 찾아서 똑같이 새벽 퇴근길이거든요. 저도 제가 뭘 하고 싶은지만 확실히 알면, 그거 하나만 찾아내면 힘들게 들어온 방송국 이거 그냥 때려치우고 진짜 내가 원하는 걸 찾아 훨훨 떠날 마음의 준비, 아니 각오는 되어있거든요. 돈 좀 덜 벌어도, 이 나이에 다시 시작하기 힘들어도, 진짜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불안해하지 말고 한 걸음씩 즐겁게 나아갈‘ 수 있는 건데. 전 진짜 제가 뭘 하고 싶은지 그걸 모르겠다구요...
이거, 모두에게 해당되는 가사 맞아요...?
저 빼고 모두가 다들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 (충격)
다들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참고 사는 거였어요? 나만 왕따였어요? 그래요???
이런 생각이 드니,
노래 가사에 한번, 이런 하찮은 내 자신에 또다시 한번 슬퍼졌다.
난 왜 하고 싶은 게 없을까. 다들 퇴사하면 이걸 하고 싶다, 은퇴 후엔 저걸 하고 싶다, 꿈도 비전도 그득그득하던데. 결국 내가 맘에 안 드는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건, 결국 그리고 싶은 이렇다 할 그림이 없는 데서 시작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무엇을 하고 싶은지라.
주말에 뭐 하고 싶어?
: 그냥 방해 없이 마음 편하게 이 봄 햇살과 바람을 느끼고 싶어요. 맛있는 커피가 있는 카페가 있으면 더욱 좋구요.
휴가 때 뭐 하고 싶어?
: 그냥 방해 없이 마음 편하게 알림 없이 평일에도 푹 자고 눈 뜨고 싶을 때 일어나서 뒹굴고 싶어요. 여행도 가면 더욱 좋구요.
은퇴 후 뭐 하고 싶어?
: 그냥 방해 없이 마음 편하게 돈 걱정 없이 건강하게 잘 자고 잘 먹고 소소한 성취감으로 취미 생활이나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면 더욱 좋구요.
흠... 이건 뭘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그냥 평안했으면 하는 욕심이잖아.
한 줄로 정리하면, [돈은 많은데 아무도 날 몰랐으면 좋겠다-] 뭐 이런 수준의 막연한 희망 사항.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노래를 만든 멜로망스는, 데뷔하고 힘들었어도 그럼에도 그들이 끝내 하고 싶은 것은 음악이었기에, 이것은 너무도 명확한 가치였기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저런 가사를 쓴 거겠지. 아름답다. 그 후 10년이나 더 음악을 해오고, 그런 그들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많고, 그렇기에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니까.
무엇을 해야 할까.
난 고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은 건 PD 딱 하나였는데. 그냥 내가 TV 보는 걸 너무 좋아하고, 또 사람들이 TV를 보면서 행복해하는걸 보는 게 좋았으니까. 그걸 이루기 위해서 10년, 그리고 이루고 나서 10년. 딱 20년이 흘렀는데. 다시 원점 앞에 선 이 기분은 뭘까. 이제 와서 또 무엇을 해야만 하는 건지 막막한데, 남은 인생이 너무 길게만 남은 것 같아 걱정도 되는데. 이젠 정말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럼 이젠 어떻게 하지. 그 답을 찾아 몇 년간 고민 중인데, 어떤 책에도, 영화에도, 지인에도, 직업 상담에도, 신점에도 답은 없었다. 무색무취한 먼지 하나가 끝없는 우주를 멍하니 맴도는 기분. 청라에도 갔다가, 멜로망스 콘서트에도 갔다가, 그렇게 하루 또 하루. 이 먼지는 언제쯤 없어지려나. 날씨는 너무도 눈이 부시고,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새로운 노래. 새로운 노래 없나.
이럴 땐 연자선생님의 [아모르파티]다
다들 잘 모른다. 아모르파티 가사가 얼마나 철학적인지.
인생이란 붓을 들고서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고 방황하던 시간이 없다면 거짓말이지
말해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