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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에 대하여

by 토스트잼





댐 위에 서 있다.

발 밑엔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는 어마무시한 톤의 물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낙하하고, 그 위치에너지에 압도되어 주위엔 소리도 빛깔도 잃어버린 풀, 돌, 새들이 흐릿한 선으로 흐린 회색을 하곤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뭐지. 나 왜 여기 서 있지?

뭐야 나 설마 여기서 떨어져 내리려는 거야?

에헤이. 그러지 마여. 아무리 꿈이래도 여긴 아니지. 아무렴 내가 입버릇처럼 “오늘은 마포대교 각이다”를 달고 살아도, 폐에 물차서 죽는 과정은 꿈에서라도 별로라고. 좀 우아한 다른 방법 없었어? 아님 간주 점프처럼 뛰어내리는 순간에서 컷 해줘. 거기까지만 할게. 내 꿈이니까 그 정돈 내 무의식이 연출해 줄 수 있잖아. OK?


댐 위에 서 있다.

아니 댐 위에 서 있는 꿈을 꾸는 나를 본다.

어휴. 그러니까 낮잠은 왜 자서는. 게으른 자의 최후다. 눕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어디 꿈속에서 한번 호되게 당해보시라지. 자, 그럼 계속 간다. 스탠바이, 큐!


댐 위에 서 있다.

아슬아슬한 발끝.

유독 이 위는 주위보다 최소 3도는 더 낮은 느낌이다. 물 때문인지, 서늘해진 내 간 때문인지.

굉음으로 세상에 잔뜩 화를 토해내는 물을 보며 생각한다.


그래. 잠깐이면 끝날 거야. 자이로드롭 안 무서워하잖아. 패러글라이딩해 봤잖아. 멜랑꼴리한 그 기분 오장육부가 한 10초 느끼고 나면, 잠깐 물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에 소름이 돋았다가, 그럼 머지않아 곧 끝인 거야. 늘 추구하고, 원했잖아. 최소비용 최대효율. 지금 잠깐 눈 딱 감고 던지면 모든 게 끝난다니까. 적당한 장소와 시간을 계산할 필요도, 이리저리 소품을 준비할 시간도, 이 후엔 어떻게 될까 고민할 이유도 없어.

떨어진다 - 끝난다. 2형식으로 끝나는 최선의 선택, 확실한 결과.

미련 없어. 어차피 결심 다 한 거. 한 번에 끝낸다.

무게중심을 머리로. 몸이 앞으로 쏟아진다, 쏟아진다. 머리부터 쏟아진다. 나는 물이다아아ㅏㅏㅏㅏ.


아니 잠깐. 근데 이 댐, 이 풍경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낯이 익은데?

아! 여기 거기 아냐? 예전에 촬영했었던 거기. 아 맞네. 어쩐지 아무리 꿈이라도 뭔가 느낌이 익숙하다 했어. 거기잖아. 그 2월 얼어디지겠는 추위에 영상통화 장면 찍으러 갔던 소양댐 거기. 와 그날 진짜 추웠는데. 출연자들도 감독님들도 진짜 이건 아니지 않냐고 원성이 자자했었잖아. 하필 코로나 때라 다들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는데, 여자 스태프들은 입김이 앞머리로 올라가서 고드름처럼 앞머리가 다 얼었었지. 웃긴다. 그때 사진 찍어둔 거 있을 텐데. 근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 한겨울에 왜 굳이 소양강까지 갔었지? 아, 출연자들 첫 데이트 장소가 소양강이라 추억 회상하는 거 찍는다고 거기까지 갔었나? 진짜 웃기네 ㅋㅋㅋ 어휴. 진짜 추운 날 추운 데서, 더운 날 더운 데서. 나 참 열심히도 살았네. 아 근데 막 기억이 되살아나는 게 이제 낮잠에서 깰 것 같은데? 이제 일어날 때가 된 건가? 그래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은 한데. 떨어지는 거야 아닌 거야? 아, 그럼 나 좀 빠져있을게. 낮잠 계속 자. 꿈 그림 계속 가보자. 고고!


댐 위에 서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그럼 그 끝이 물속이 나은 것일까 맨땅이 나은 것일까.

풍덩과 콰직. 어느 게 괴로움의 크기가 더 작을까.

어차피 죽을 건데 괴로움의 장르가 중요해?

아, 중요하지. 최소비용 최대효율. 끝이 같다면 그 과정은 시간이 짧을수록, 고통의 크기도 작을수록 더 잘한 선택인 거야. 폐에 물이 차오르는 시간과 고통, 뇌가 깨져 의식을 잃는 시간과 고통. 어느 게 나은 걸까. 풍덩과 콰직. 음… 높은 건물 위로 올라가는 게 옳은 선택이었나. 음… 그럼 여기 괜히 온건가. 아 근데 날을 다시 잡는 것도 일이야. 오늘 안 죽으면 내일은 출근이라고. 그냥 날 잡은 김에 끝내. 물이 낫지 뭐. 맨땅에 헤딩보다야 물속이 아름답지. 생명력 있는 바다도 아닌, 이곳은 수몰 지역. 수많은 이들의 이별과 슬픔과 눈물이 가득한 이 물속이 뭔가 더 운치 있고 사연 있어 보여.

좋았어. 이번 생은 여기 눕는다. 자! 레디,


엇.

근데 주위에 누구 없는지 확인했어?

너 고3 때 기억 안 나? 모의고사 망해서 시험지 찢어버리러 올라갔던 집 앞에 올림픽대교. 그 때 CD플레이어를 뚫고 들어온 그 경찰차 굉음 기억 안 나냐고. 반대편에서 누가 떨어진 건지, 싸움이 난 건지 경찰차며 119며 몰려들어서 난리였잖아. 그리고, 넌 떠올렸지. 정확히 10분 전, 교복 입은 네 곁을 스쳐 지나가던 쎄한 느낌의 한 청년. 그리고 마주친 그의 눈동자.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니겠지-

무서운 마음에 시험지 고스란히 가방에 다시 욱여넣고선 황급히 집으로 뛰쳐갔었잖아. 제발 아까 그 남자가 뛰어내린 게 아니기를. 그가 잘 살아만 있기를.

아니, 제발 무심했던 내가 죽인 게 아니기를. 하고.

그러니까 댐 주변에 누구 없었나, 확인했냐고. 갈 거면 혼자 곱게 가라고. 다른 행복한 인생에 피해 주지 말라는 거야. 아 물론, 나도 고3 그 당시에 절대 행복하진 않았었는데, 그래도 그건 뭐랄까... 상도덕이 아니니까. 아무리 꿈속이라도, 최소한의 이타심... 뭐 그런 개념은 챙기라구.


댐 위에 서 있다.

오래도 서 있었다.

이젠 안 떨어지면 더 이상해질 때까지 왔다.

뭔데. 왜 그렇게 생각이 많고 망설여지는 건데.

나 살고 싶은 거야? 그런 거야?

눈물이 흐른다.

눈물이 뚝뚝 흘러 이별과 슬픔이 가득한 댐의 사연에 보태어진다.

한 발, 아 아니야.

또 한 발, 아 진짜 이렇게 끝이라고?


야!!! 관둬, 관둬.

에휴. 아무리 꿈이라지만 진짜 어째 꾸는 꿈도 나만큼이나 답답하냐.

자는 건지 깨있는 건지도 애매하고

죽을 건지 안 죽을 건지도 애매하고

답답시럽네 증말.

아 관둬!






엊그제 저녁을 먹고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길, 후배는 이야기했다.

자기는 매일 밤 꿈을 꾼다고.

근데 그 꿈이 너무 총천연색으로 시각적으로도 강렬하고 내용마저 뚜렷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그 꿈을 바로 메모장에 적어놓는다고. 그리고 때로는 예지몽같이 실제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기도 해서 가끔은 무섭다고. 마침, 그날 꾼 꿈은 너무 알록달록한 분홍빛이 강렬했는데, 그 색감이 마치 진주의 영롱한 그것과 같아서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고.


부러웠다.

매일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주기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심지어 거기서 영감을 받을 수 있다니. 그 어떤 책을 읽는 것보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짜릿하고 기다려지지 않겠는가. 매일 밤 마주하는, 남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그 무의식의 세계가.

정작 당사자는 수면 질 저하로 늘 피로함과 면역력 저하를 달고 살지만, 그것마저 멋있었다. 이건 아티스트의 숙명과도 같은 거잖아…! 달게 받아야지. 돈 주고 사고 싶다, 그 만남. 한 번이라도 제대로 경험해 보고 싶다, 그 세상.


그래서 자봤다.

낮잠.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제발. 내게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그곳은 댐.

댐 위에 서 있다.

아니 댐 위에 서 있는 꿈을 꾸는 나를 본다.

뭔가 따뜻한 게 눈에서 흘러내린다.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린다는 걸, 자고 있는 나조차도 알겠다.

내 일그러지는 표정을, 내 눈으로도 본다.

이제 꿈인지 실제인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는 댐 위에 서 있다.

나는 서 있다.

2형식으로 끝나는 최선의 선택, 확실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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