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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바다에 가는덴 이유가 있다

by 토스트잼


산정호수… 산정호수?


들어봤다.

아니, 가봤던 것 같다.

중학교 때였나… 수련회를 이 근처로 갔었다. 아니, 갔었던 것 같다.

지금 기억나는 거라곤, 늦은 밤 캠프파이터 마무리즈음에 레크리에이션 강사님이 부모님 이야기를 하며 감성 넘치는 울음바다 분위기를 조장(?)할 때, 나는 눈물이 단 1g도 나지 않는데다 그 억지스런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아 속으로 열심히 god 노래를 흥얼거렸던 얄팍한 반항심 정도지만.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슴푸레한 새벽, 그 산정호수의 물안개를 본 것 같은 기억도 있다. 수련회에서 아침 운동을 시킨 건지, 그래도 거기까지 갔는데 호수는 다녀오지 않았을까 싶은 기억의 조작인지는 이제 직접 가서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을 터다.


운 좋게 평일 1박2일의 짬이 난 지금, 난 산정호수로 향한다.

그곳으로 향하는 이유는 딱 두 개다.


그토록 난, 무척이나 호수가 보고 싶었고

그러나 난, 멀리 갈 에너지가 없기에 무조건 서울에서 가까운 곳을 택했다.


그곳이 산정호수다.

이젠 더 이상 도심 속 석촌호수 따위로 이 마음의 일렁임이 다 눌러지지 않을 때가 왔기에, 더 큰 호수로 눌러보는 거다.


많은 이들이 머리를 식히기 위해, 혹은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탁 트인 바다를 찾는다지만

난 되려 바다를 보면 예고치 않은 큰 것이 엄습할 것만 같은 불안감, 혹은 되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고단한 먹먹함이 느껴진다. 맞다. 먹먹함. 막막함. 묵묵함. 그 네모들이 숨이 막힌다. 애써 밀려오고, 밀려오고, 밀려와도 만유인력의 법칙 안에서 용을 써봤자 거기서 거기인 모래사장의 물자욱이나, 치워도 치워도 또 생기는 해변의 쓰레기나, 기껏 쏘아 올려봤자 15발 정도로 그치는 몇천 원짜리 폭죽이 그렇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비슷했을 거다. 비슷한 정도의 밀썰물 차이, 비슷한 수준의 비양심, 비슷한 퀄리티의 유희들.


아, 이런 처지는 이야기 그만해야지.

난 휴가니까.

난 지금 남들 한창 괴로운 월요일에 호수를 찾아 떠나는 승자니까.


”저 바람을 타고 어디든 날아볼까

오늘을 잊은 채 내일도 접어둔 채“

고작 경기도로 빠지는 강변북로 위에서, 노래는 기깔나게 정미조 선생님의 <7번 국도>를 들으며 생각한다.


그럼, 내 인생 최고의 호수는 어디였을까.

고민되는 두 장소가 있지만, 망설임 없이 단연 크로아티아에서 만난 [플리트비체 호수]를 꼽는다. 영화 <아바타>의 촬영지이자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된, 뭐 이런 수식어 다 필요 없고 “진짜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싶은 곳.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큰 국립공원의 광활함과, 동화 속이라 해도 믿을 만한 생명력 넘치는 동식물들의 조화, 그리고 그 모든 걸 품어내는 투명한 옥빛 호수.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은 곳에 배낭을 던져두곤 앉아 눈앞에 옥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눈이 감기고, 온통 주홍빛으로 물드는 세상. 구름이 지나는 자리마다 내 세상이 붉었다, 어두워졌다, 붉었다, 어두워졌다,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반팔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온 세포가 놀라 귀가 다 쫑긋. 들리는 건 얕게 찰방거리는 물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여기가 천국인가. 그 옥빛 호수를 가로지르는 유람선 안에서, 노래를 들으니 눈물이 다 났다.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호수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내가 감히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있을까”


남들 대학 때 다 가보는 유럽여행, 어학연수 한번 못가보다

어쩌다 보니 취업을 하고서야 처음으로 접한 낯선 세계였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할머니가 되어서 패키지로도 갈 수 있으니, 남들 잘 안 가는 곳부터 내 두 발로 돌겠다며 얄팍한 반항심으로 고른 나의 자발적 첫 해외 여행지, 크로아티아.


세상엔 이렇게나 키 크고 멋지고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 많고,

세상엔 이렇게나 깨끗하고 광활하고 드라마틱한 그림 같은 풍경들이 많고,

세상엔 이렇게나 다양한 삶과 이야기들이 곳곳에 존재하는구나.


그런 곳에 내가 와있네.

이렇게 건강하고, 야무지고, 충만하게도.

내 인생 이제 비로소 시작인데, 앞으로 이런 천국들을 더 많이 만날 일들만 남았네.

힝 어떡해- 내가 저 호수라도, 저 나무라도, 저 아이스크림 사장님이라도 날 응원해 주고 싶겠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겠지?

_이게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_아.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난 그 호수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단, ‘처음’이어서 최고로 기억에 남는 거겠구나.

물론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그로부터 10년 후인 지금의 내가 같은 곳을 갔더라면, 같은 행복감을 느꼈을까. 과연.




그렇게 도착한 산정호수.

역시나 그렇듯, 여행은 떠나기 전이 제일 설레는 법이다.

기껏 시간 내서 도착한 그곳에선, 내 눈엔 다시 먹먹함. 막막함. 묵묵함. 네모네모한 렌즈가 끼어졌다.


01/
생각 없이 무작정 걷고 싶어 선택한 산정호수는,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다.
1시간도 안 돼서 한 바퀴를 다 돌았을 정도니까. 어렸을 땐 그렇게나 크고 대단하게 느껴졌던 곳이, 역시나 어른이 되고 나면 많은 게 참 하찮고 심드렁하게 느껴지는구나. 노화의 습격.

02/
걷다 보니 관광객들을 위한 몇몇 식당들과 놀이 기구, 다 낡은 포토존 등을 질서 없이 한데 모아놓은 구역이 보인다. 분위기며, 풍경이며, 색감까지. 어느 교외, 어느 관광지에나 보일법한 뻔한 클리셰다. 그 속엔 낭만과 운치보단 생존과 생계의 한숨들이 더 무겁게 내려앉곤 한다. 텅 빈 식당의 ‘들어오세요, 맛있어요’하는 호객 행위에선 더 들어가고 싶지 않게 하는 죄송스런 맘의 무게가, 초등학생 한두 명을 대상으로 ‘자, 돌립니다!!‘ 해놓곤 ’다 돌려놔~ 너를 만나기 전에 내모습으로~‘를 열창하는 놀이 기구 사장님 목소리에선 그의 세월과 빛바랜 청춘의 무게가. 언젠가 누군가에겐 제일 반갑고 핫했을 이 장소도, 언젠간 색이 바래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세월의 습격.

03/
관광지를 빠르게 스쳐 지나, 사람들이 드문해진 고요한 산책길로 접어든다. 햇살도, 바람도, 온도와 습도도. 크로아티아 못지않다. 그래, 이 고요함을 느끼고 싶어서 온 거잖아. 마냥 앉아서 물멍을 하며 생각이란걸 하지 말아보자-. 는 와중에 문득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땅에 뿌리를 두곤, 머리가 온통 물을 향하고 있다. 아니, 호숫물에 머리를 감고 있다. 아니, 머리를 처박고 있다가 더 적절해 보인다. 그 꺾임 정도가 심해서 부러진 나무들도 보이고, 오히려 부러지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휘어져서는 보는 내가 다 허리가 아프고 대체 왜 이 생명체는 이런 존재로밖에 살아남을 수 없는 건지 원망이 다 든다. 이렇게까지 힘겹게 생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를 누가 좀 알려주면 안 되나. 왜 누구는 고개 똑바로 쳐들고 하늘만 바라보며 쭉쭉 자라도 꼿꼿하다 칭송받는데 왜 누구는 이렇게 뒤틀린 채로, 본인도 보는 이도 모두 괴로울 만큼 벌을 받으며 물고문을 당해야 하는 걸까. 산책길을 따라가다 보니 이게 한두 그루가 아니다. 아. 괴로운 인생사. 불행의 습격.



괴롭다。 보는 내가 다 목디스크가 올 것 같은 나무들의 괴로운 자세



아, 이런 처지는 이야기 그만해야지.

난 휴가니까.

난 지금 남들 한창 괴로운 월요일에 호수를 찾아 떠나온 승자니까!!!


라고 소리 지르고 싶지만

잔뜩 먹먹하고 막막해져서는 더 이상 걸을 힘도 나지 않는다.

이 평일 휴가에, 이 좋은 계절에, 왜 나 여기까지 온 건데.


눈앞에 보이는 이 상황들이 진짜로 막막한 거야, 아니면 그냥 뭘 봐도 내 눈이 먹먹한 거야.

다들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오랜 세월 풍파에도 잘만 살아가고 있는데,

진짜 다들 아무렇지 않은데 나 혼자 막막렌즈 껴서 청승 떠는 거야? 그런 거야?


오늘, 내가 크로아티아로 떠났으면 어땠을까.

플리트비체 호수에 대한 내 기억은 어떻게 남았을까.


너무 반복되는 일상에 고여 있었나 보다. 아무래도 몸도 맘도 편해서 이런가 보다.

호수가 아닌, 이젠 진짜 바다를 보러 가야 할 때인가.

고인 물웅덩이 안에서 찰방찰방할 게 아니라,

쓰나미가 몰려와 한방에 바닥 모래부터 위에 미생물들까지 아래에서 위로 판을 한번 싹 갈아엎어 줄 큰 파도를 맞으러 갈 때가 온 것 같다.

잔잔한 자극 말고, 새롭게 눈이 번쩍 뜨일 변화.


”저 바람을 타고 어디든 날아볼까

오늘을 잊은 채 내일도 접어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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