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내 취미는 광화문 한복판의 4층짜리 통 스타벅스(연식이 나온다. 그 건물은 이미 새로 지어진 지 꽤 되었다) 맨 꼭대기 층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거였더랬다. 세상 모든 혈당 스파이크를 갈아 넣은 자바칩 프라푸치노 큰 사이즈에 블루베리 머핀(연식이 나온다. 이 메뉴는 스타벅스에서 사라진 지 꽤 되었다) 하나를 시켜두고는 몇 시간이고 창밖을 내다보며 멍때리는 것.
입학 이래 늘 잠재적 취업 준비생이던 그 시절엔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모든 직장인들이 다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는 거라.
1. 바쁘게 통화하며 걸어가는 슈트 차림의 남성
2.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잔뜩 들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여주인공처럼 구두 걸음으로 또각또각 뛰어 들어가는 어여쁜 언니
3.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며 세상 중요한 이야기를 밀담으로 나누는 구름 무리들
4. 잘 닦이다 못해 파리도 미끄러질듯한 반짝거리는 차에서 내리는 각 잡힌 관공서 직원들.
저마다 세상의 비싼 쓸모를 자랑하는 이들이
이름만 들어도 가슴 웅장해지는 간판이 붙은 높은 사옥 건물들에 모여
개인을 넘어 국가에 이로운 더 큰 가치를 창출해 내어
끝내 세계와 인류의 진화에 이바지하는
_줄 알았던 장면들의 작은 조각들.
직장인이 된 지금의 내가 다시 그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본다면, 분명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1-1. 부장님한테 전화로까지 쪼임을 당하며 밥 먹다 말고 급하게 회사로 복귀하는 남자 대리
2-1. 요즘 세상에 커피 셔틀까지 해야 하는 막내 여사원의 짜증 난 발걸음
3-1. 대출 이자 상승과 코인 폭락으로 담배 연기보다 더 씁쓸한 한숨을 내뱉는 무리들
4-1. 초 단위로 짜여진 의전행사에 AI보다 더 영혼 없이 움직이는 공무원들
역시, 멀리서 봐야 희극이다.
내 일 아니지 싶어 멀찌감치 흐린 눈으로 쓰윽- 볼 땐 다들 평화롭고 좋아보였을지라도, 비슷한 처지가 되어 속속들이 바라보게 되면 슬픈 사연 아닌 것이 없고 마냥 아름다운 것 또한 흔치 않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숲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이파리 하나까지 가면
징그러운 진드기들, 썩어가는 밑동, 인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칼자국, 평생 일만하다 죽는 개미 떼의 신음까지.
가까이 보면 비극 천지다.
확대해서까지 희극이란 장르가 있기는 한 건가 싶다.
그래서,
무색무취 인간. 즉 취향이란 1도 없고 좋아하는 것 또한 딱히 없는 내가
유일하게 ‘행복’이란 단어에 감히 가깝게 해석하는 것은
‘뷰 멍’이다.
말 그대로 먼-곳이 내다보이는 뷰를 마주하고 그저 말없이 멍때리는 것.
그 뷰가 바다건, 숲이건, 도시건 그것은 상관없다.
무엇이든 멀리서 봐야 희극이다.
머얼-리 내다보이면 멀수록, 앞이 탁- 트이면 트일수록 좋다.
그런 곳에서라면 하염없이 흐린 눈을 하고서 뇌의 나사를 살짝 빼놓곤 몇 시간이고 평화로이 멍때릴 수 있는 거다.
물론, 더 품격 있는(?) 멍 짓을 위해
오래 앉을 수 있는 편안한 의자가 갖추어진 곳이나, 안전한 위치의 곳이라면 더 좋고,
이왕이면 커피 한잔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카페 같은 곳이라면 더 좋겠지만,
오롯이 뷰를 누릴 수 있는 시각적 사치에만이라도 몰빵할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 스위스 호수 유람선에서 하염없이 바라본 푸른 산 (가끔 천둥이 치는 와중에 굳이 비바람을 다 때려 맞으며 선상에 올라가 있는 동양 여자를 모두가 이상하게 봤다)
* 63빌딩 꼭대기 층에서 열린 전시회의 통창을 통해 내려다본 아름다운 서울(전시회는 보지도 않고 그저 구석 통창에 매달려 문 닫기 직전까지 다리 아프게 서 있다만 왔다)
* 한라산 백록담에서 내려다본 끝없이 펼쳐진 뭉게구름 (올라가는데 3시간 반, 내려가기 싫어 멍때리는 데도 3시간 반을 써 입산 통제 시간에 겨우 맞춰 내려왔다)
* 포르투갈 선셋이 잘 보이는 어느 마을의 낭떠러지(?) (돌에 걸터앉아 보는 스팟이었는데, 진짜 발 조금만 삐끗하면 저세상이었다)
* 서해 바다에서 캠핑 의자치고 한없이 바라보았던 수평선 (잠깐 잠에 들었다 깼을 때, 밀물이 엄청나게 들어와 하마터면 갯벌에 갇힐 뻔했다)
* 마음이 유독 힘들었던 날, 마포대교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다본 야경 (1시간 반이 좀 넘었을까. 경찰 아저씨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신고가 들어왔다고. 이제 내려가시라고.)
역시, 이왕이면 멍 짓도 품격 있는 곳이 더 좋다.
오래 앉을 수 있는 편안한 의자가 갖추어진 곳이나, 안전한 위치의 곳이라면 더 좋다.
그래서 나는 쉬는 날이면 앞이 탁 트인, 혹은 멍때리기 좋은 카페를 찾는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장소가 그렇다.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창 뷰의 한 카페.
모두가 일터에, 혹은 학교에 있을 평일 오후.
대화가 금지된 이곳에서, 나는 흐린 눈을 하고 덕수궁 담벼락 안을 멀찌감치 들여다본다.
수백 년을 같은 위치에서 고귀하게 서 있는 저 오래된 궁궐,
한국을 처음 찾은 듯한 외국인 여행자들의 신난 발걸음,
평일 낮 고궁의 고즈넉함을 찾아온 듯한 노신사,
수학여행을 왔는지 같은 옷을 맞춰 입고는 꺄르르 신난 중학생 무리들…
역시, 멀리서 봐야 희극이다.
이 평일 오후의 나른함과 고궁이 주는 특유의 평온함을 누릴 수 있는 건
내가 덕수궁에 굳이 들어가지 않고, 한 발짝 멀찌감치서 살짝 흐린 눈을 한 채 보기에 가능한 평화다.
이 더운 날씨에, 굳이 입장료를 줘가며 덕수궁에 들어갔다간
땀에 절어 여기저기 둘러볼 생각일랑 일찌감치 접었고,
접지 않았을지언정 시각적 풍요를 덮치는 도심의 소음에 집중이 하나도 안되었을테고,
4계절이나 있는 이 나라에, 굳이 이 폭염 시즌에 온 외국인들이 안타까웠(지만 영어를 못해 도움은 못됐)을 것이며,
제멋대로 뛰어다니는 중학생 무리를 피하느라 애쓰다가,
지팡이 짚은 노신사가 혹시 외로움이나, 생활고에 시달리고 계신 건 아닌지,
이 폭염에 이곳까지 어쩌다 혼자 오신 건지, 함께 부축해서 올 가족이나 자제분들은 없는 건지.
근데 나는 결혼을 안 해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함께 올 가족도, 자식들도 없는데, 그럼 현재의 1인 가구들은 미래에 어떻게 되는 건지. 나아가 기대수명이 점점 늘어나는 이 현상이 축복이 아닌 비극이 되지 않으려면 나는, 그리고 국가는, 그리고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해결 안 될 비관적인 생각들에 한없이 후회했을 것이다.
망할.
덕수궁 따위는 왜 와가지고는_하며.
역시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_라며.
그래서, 여유롭게 한 발짝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통창으로 모든 소음이 차단된, 시원한 에어컨 바람 밑에서
‘뷰’라는 명목으로 흐린 눈을 한 채 덕수궁의 풍경을 간접 체험할 뿐이다.
간접 체험이라.
그러고 보니 나 참 용기도 없네.
용기가 없는 걸 넘어서 점점 비겁해지네.
가까이서 보게 될 비극이 두려워 흐린 눈을 한 채 애써 즐거운 것만 보려 하는 얄팍한 심산.
어쩌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 아니라
그냥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 자체가 이미 비극 쪽으로 많이 기운 거 아닐까.
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내 눈.
무엇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내 눈.
분명 대학생 때 스타벅스에서 본 광화문의 풍경은 역동적이고 에너제틱했다.
나도 저 풍경의 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생각하며,
세상은 꽤나 살만한, 살아 나갈만 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아니, 무엇을 보아도.
이게 나에게 닥친 가장 큰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