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36분.
새벽 4시 36분.
하. 다행이다.
아직 잘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이 나른한 몽롱함에서 깨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넘어 묘한 짜릿함마저 느껴진다.
하. 다행이야.
휴대폰 액정 불빛에 시큰해진 눈을 잠시 감았다, 또 떴다,
찡그렸던 눈가 주름을 늘렸다, 줄였다,
다시 몸을 돌려 누워 대자로 뻗어본다.
마주 보이는 천장은 늘 그렇듯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부럽다. 천장.
이런 날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되는 존재여서.
내가 새벽에 잠을 못 이뤄 한참을 뒤척여도,
어떤 날은 씻지도 못한 채 지쳐 곯아떨어져 자도,
어떤 날은 아침 알람 소리에 괴로워 죽지 못해 겨우 몸을 일으켜도,
또 어떤 날은 지각인 것도 모른 채 세상모르고 또 자도,
그리고 지금처럼 내가 눈을 부릅뜨고 마주 보아도,
그냥 넌, 그 자리에 있으면 되잖아.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세상에 젤 부러운 것들이 그런 거다.
그저 가만히, 존재만 해도 되는 것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내지 않아도,
존재 이유를 애써 남들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만으로도 괜찮은 것들, 괜찮은 사람들.
지금 천장 너도 그렇다.
윗집과 아랫집 사이. 그저 존재한다.
아등바등하며 사는 나의, 가장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그저 아무런 반응 없이 나를 지켜볼 뿐.
새벽 4시 36분.
지금 이시간에도 넌 날 그저 마주하고만 있지.
왜 깼니-, 다시 자도 돼-, 출근까지 몇 시간 남았어- 등 어떠한 한마디도 없이.
고요.
사위는 조용하다 못해 먹먹해
마치 진공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아무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도 살아있지 않다.
행복한데.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평온함.
이 세상에 모든 게 다 사라지고 오롯이 나만 남은 이 기분.
그럼, 나 내일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해.
시끄러운 아침 알람 소리를 겨우 꺼뜨리고,
눈을 잔뜩 찡그린 채 최소한만의 빛을 안구에 서서히 흡수시켜
터벅터벅, 창문으로 걸어가 커튼을 젖혔을 때
세상 밖이 온통 모래바람으로만 가득 찬 그 장면.
원래 있던 공원도,
도로 위 차들과 표지판도
한참 걸어 다닐 출근길 사람들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던 그 모든 것들과
부도 명예도 성공도 권력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마저 싸그리
모래바람이 집어 삼켜버린 그 풍경.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무엇이 모래이고 무엇이 바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고, 그 구분조차 의미가 없는 세상.
새벽 4시 36분.
다행이야.
아직 꿈꿀 수 있어.
천장과 나만 존재하는 이 고요함의 창문 너머에,
어느새 모래바람만이 가득할 수도 있어.
휘잉-
하고 날리는 그 모래바람 속엔 정신없이 작은 입자들이 날린다.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잘게, 균일하게 갈아버린 미세한 흔적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입자들 사이엔
풀과 꽃들도, 동물과 사람도, 건물과 유적도, 황금과 쓰레기도, 기쁨과 슬픔도.
휘잉 휘잉-
정신없이 갈려버린 모든 것들.
근데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어.
그 모래바람 속에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나 또한, 너 또한,
이미 진작부터 믹서기 속 과일처럼 갈린 삶을 살았으니까.
위잉 위잉-
정신없이 돌다 보면 시간도 계절도 세월도 빠르게,
그리곤 어느새 내 영혼도 잘게 갈려있다.
덜커덩, 덜커덩-
그 와중에 덜 갈렸다 싶은 게 있으면
버튼을 멈췄다 다시 위잉 위잉-, 다시 멈췄다 위잉 위잉-
잠시 멈췄다가 다시 갈면 더 잘 갈린다.
그 멈춤이, 혹시 잠은 아닐까.
잠시 재웠다가, 다시 갈리고
잠시 재웠다가, 또다시 갈리고
반복 속에 시간도 계절도 세월도 잘도 간다.
위잉 위잉
그 수번의 반복이 지나면 모든 게 깔끔하게 잘도 갈려있다.
휘잉 휘잉-
정신없이 갈려버린 모든 것들.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잘게 갈아버린 미세한 입자들.
그래서 더 잠을 자도 좋고,
더 잠을 자지 않아도 좋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의 새벽 4시 36분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