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10년 만에 연예인을 만난 예능PD
“아니 좀 들어봐.
내 얘긴 아니고 내 친구 얘긴데…
응? 아니 내가 그것까진 어떻게 알겠어. 내 친구 얘기라니까?”
그렇다. 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선을 긋고 시작하련다.
혹시나 이 주책맞은 짓들이 다 내 이야기 아니냐며 오해받을 수 있으니, 이는 실제 당사자인 친구 A의 일임을 다시금 분명히 해둔다. 공감 능력이 과하게 뛰어난 대문자 F로서 마치 내 일처럼 느껴져 가끔 ‘나는-‘하고 튀어나오더라도 혹시나 행여나 설마라도 오해 마시길.
A는 내일모레 마흔.
일상의 대부분이 회사-집-회사-집뿐인 싱글 여성이다. 직업은 방송사 PD.
직업란의 수식어와 맞지 않게, 일은 일로만 하는지라 ‘연예인 보기를 돌같이’하던 A가 최근 입사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좋아하는 연예인이 생겼단다.
오호? 웬걸. 대체 무슨 일이람.
평소엔 연예인 관련해서 주변에서 뭘 물어봐도
‘그런 자세한 것까진 모른다. 우린 카메라 꺼지면 끝이다’
‘분칠한 것들은 믿으면 안 된다’
‘일만 하는 사이다. 난 좋지도 싫지도 않다’
‘연예인 걱정 하는 게 제일 쓸데없다’
는 식으로 늘 시큰둥하게 답하고, 일반인들이 궁금해할 만한 방송가 뒷이야기- 뭐 이런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 번을 풀지 않길래 ‘대체 저 인간은 어쩌다 PD 일을 하게 된 거지?’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로 철벽을 치던 A였다.
근데 그러던 A가 웬일로. 좋아하는 연예인이 생겼단다.
“뭐야. 이번에 같은 팀 했던 사람이야?”
”같이 대화해봤어? 회식 같은 것도 했어?“
“그래. 방송국 다니는데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덕질이라도 해야지 행복하지 않냐고.”
“그래서 누구야?”
뜸을 들이던 A가 드디어 입을 연다.
“… 아니… 그 유..연석”
엥…?
뭐야. 같이 일해보거나 접점이 있던 사람도 아니고,
이제 막 데뷔한 반짝반짝 신상 아이돌도 아니고.
갑자기 웬 배우…? 옛날 그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온 그 유연석?
평소에 시간 많이 잡아먹는다며 드라마도 잘 안 보던 A가 대체
어떤 작품에서
어느 포인트에서
어떻게 덕통사고를 당한 건지가 궁금해졌다.
“요새 하는 <지금 거신 전화는> 그거 봤니? 해외선 인기 많다던데”
“아 거기도 나오긴 했는데... 난… <꽃보다 청춘>…”
음? 할배들처럼 해외로 여행 간 그 예능?
그렇다.
A가 본격 덕통사고를 당한 곳은 드라마도, 영화도 아닌 무려 10년 전, 2014년에 방송된 <꽃보다남자-라오스> 편이었다. 당시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대박이 났고 거기서 해태, 빙그레, 칠봉이 캐릭터를 맡은 손호준, 바로(B1A4), 그리고 유연석이 채널홍보촬영을 미끼로 모였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나영석 PD에게 납치당해 라오스로 떠나는 취업사기에 가까운 예능. 자연스럽고 날 것에 가깝게 찍힌 <꽃보다 청춘-라오스>에서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당시 앳된 서른한 살의 유연석을 바라보며 ‘난 왜 최애를 이제서야 발견한 걸까’ 싶어 지난 잃어버린 10년을 후회했다나.
“저런 아들이 또 없어.
뭐든 잘 먹고, 어디서든 잘 자고, 근데 또 반듯하고 부지런해. 지구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살아남을 녀석이야.
저런 오빠가 또 없어.
기본적으로 배려심이 많고 남을 잘 챙기고 따뜻해. 그게 행동으로 보인다니까?
저런 남자 친구가 또 없어.
나영석이 그랬다잖아. “만일 나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소개 시켜주고 싶은 남자” 이 말 하나로 끝난 거 아냐?
저런 남자가 나중에 아빠가 되면 진짜 잘할 거야
이것저것 재주도 많은데 심지어 다 잘해. 사기캐야. 기본 유전자가 등급이 높아.”
어쭈. 아주 보호자 납셨네.
만면에 미소가 퍼지는 것이 피부과 시술이 따로 필요 없는 저 광대 리프팅 효과를 보라. 아주 자기 아들 자랑하듯(이미 나이는 그럴 나이) 유연석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과 축복이 교회 집사님보다 한 수 위다.
"유연석은… 그냥. 본캐가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인 것 같아"
차마 다른 사람한테는 남사스러워서 할 수 없던 고백을, 알 거 다 아는 15년 지기 동종업계 친구인 나한테만 커밍아웃한단다. <꽃보다 청춘>을 시작으로 그간 유연석이 나온 온갖 예능, 토크쇼, 인터뷰, 유튜브, 개인 SNS를 두 달간 두더지처럼 파고 다녔다는 A는 드라마 역할이 아닌, 예능에서 보이는 ‘유연석 본캐’에 꽂혔단다. 근데 대체 뭐가 ‘본캐’라는 거야. 어차피 다 콘텐츠 통해서 본 거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빤히 다 아는 방송국 업자가 카메라 도는 데서 연출된 걸 있는 그대로 다 믿는다고? 그 연차에? 흥.
A는 평소 취미며 흥미며 세상에 좋아하는 것 하나 없고, 바싹 말린 걸레처럼 물기 하나 없는 딱딱한 핵노잼 인생이었다. 심지어 사회생활 시작한 후론 영장류 자체를 극혐하는지라 나는 평소와 다른 A의 이런 반응이 신기하면서도 그저 감격스러운 거라. 간만에 눈이 반짝거리고, 도파민 싹- 돌아 신나서 떠드는 모습. (아, 물론 이 나이 먹고 참으로 주접이 풍년이지만... 이게 연예인이 아니라 진짜 ‘만질 수 있는’ 남자 사람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뭐... 이하 생략) 하지만 그럼에도 응원하고 싶은 이유는 A가 사람, 그것도 연예인에 홀랑 빠진 건 아마 거의 30년 만이기 때문일 터다.
때는 20세기 말, 학창 시절. A는 당시 H.O.T의 지독한 팬이었다.
유튜브 라이브도, 온라인 티켓팅도, 음원사이트도 없이 몸빵이 유일한 수단이었던 그때 그 시절. A 또한 가진 건 체력과 열정밖에 없었기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덕질에 몰빵해가며 험한 사춘기를 통과 중이었다.
하루는 학원 간다고 부모님께 거짓말하고 고속버스 대절해서 지방 팬 미팅에 다녀오고, 하루는 콘서트 티켓을 구매하겠다고 밤새 꼬박 (구)제일은행 앞에 줄을 섰다. 하루는 오빠들을 보겠다고 들어가지도 못할 공개방송을 굳이 가서는 경호 아저씨들한테 혼나 가며 추위에 떨다 오고, 아주 가끔 열정이 과한 날이면 (그러면 안 됐지만) 당시 오빠들 숙소 앞엘 찾아가 저 멀리 오빠들이 출근하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의 성적보다 오빠들의 앨범 판매량이 더 오르길, 나의 하루보다 오빠들의 무대 위 3분이 더 행복하기를- 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면서 정작 사랑하는 딸에게 배신당한 엄마에겐 수도 없이 등짝 맞을 일을 했다.
그렇게 등짝 맞고 자란 A가 끝내 방송국 PD로 취업뽀개기에 성공하자, 주위에선 성덕(성공한 덕후)이라며 얼마나 좋냐고 부러워들 했다. 오래지 않아 실제 문희준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으로 팀 배정까지 되자, 진짜 말 그대로 최애와 ‘일로 만난 사이’까지 된 것이다.
십수 년 전, 멀찌감치서 방송국엘 들어가는 오빠 뒷모습을 보며
‘오빠는 대기실에서 누구랑 무슨 말을 할까?’
‘방송 중간중간 오빠가 마시던 물은 나중에 누가 챙겨가는 걸까’
하며 그의 곁에서 일하는 모두를 부러워했던, 그 사람이 결국 지금의 자신이 되었으니 남들 말 따라 성덕이라 할 만 했다.
그 팀으로 배정받았단 소식을 듣고, 몇 달 지나지 않아 A에게 저녁을 먹으며 물었다.
“아니 그래서, 고백했어?”
“뭘?
“나 옛날부터 H.O.T. 팬이었다, 오빠 덕분에 방송국 들어왔다, 함께 일하게 돼서 영광이다 등등 하고 싶었던 말이 얼마나 많아. 그 팀 회식도 매주 한다며!!”
“… 그런 거 말해서 뭐 해”
평소의 시니컬한 A 다운 답이었다.
하루의 피로와 지침이 역력한 말투. 좋아하는 오빠고 아빠고 나발이고 그저 퇴근 후엔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만날 에너지도 없다는 A는 사실 방송국 입사 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늘 시간에 쫓겨서 짜증이 늘고, 맘에 여유가 없다 보니 주변 사람을 예전처럼 잘 챙기지 못하고, 에너지를 회사에서 다 태워버려 쉴 땐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회색빛으로.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이 느끼는 이런 번아웃 외에,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는 게 A의 넋두리다. 입사 초창기부터 몇몇 팀을 돌고는 A는 답 없는 질문을 많이 던지곤 했다.
“이 바닥에 좋은 사람이 있긴 한 거냐”
“엥?”
“아니. 뭐 어떻게든 좋게 편집해서 나가잖아. 근데 그게 다 거짓말인 경우도 많잖아.”
… 그렇지. 방송과 실제는. 다를 수도 있지. 아니,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지.
‘카메라’라는 한 겹의 필터를 거쳐야만 비로소 대중에게 가닿는 사람들.
어쩌면,
수많은 필모그래피로 찬사받는 배우 X는, 관객들에겐 국민 배우로 찬사받지만,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에게는 너무도 피곤한 그의 강박과 고집으로 두려운 사람일 ‘수도’ 있다.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 걸 그룹 가수 Y는, 대중들에겐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지만 그 이미지는 정작 실제 그녀와 정반대, 소속사에서 입혀준 가짜일 ‘수도’ 있다.
베테랑 MC Z는, TV로 본 그의 자질과 진행 능력엔 누구도 의심하진 않지만, 이는 생방송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잘 정제된 편집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다.
일로 만난 사이.
프로그램도, 방송국도, 연예인도. 목표는 모두 같다.
대중에게 사랑받을 것. 경쟁자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것.
이를 위해 서로의 니즈에 맞춰 각자가 가진 재능을 사고파는 일종의 거래. 대신 늘 신상 대체제가 쏟아지기에 최대한 서로를 빠르게 써먹고 옮겨 타는 단타 거래. 이게 바로 방송 산업이다. 이 거래에 있어선 서로가 조금도 손해 보면 안 되기에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어쩔 수 없이 서로의 민낯과 욕망을 보여줄 수밖엔 없고, 이를 뻔히 알면서도 적당히 눈감아 줄 수밖엔 없다.
그저 우리에겐 서로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알잘딱깔센. 그 과정 중에 ‘좋은 사람’은... 뭐 있으면야 좋겠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아니. 뭐 어떻게든 좋게 편집해서 나가잖아. 근데 그게 다 거짓말인 경우도 많잖아.”
“근데. 뭐 그게 중요하니.”
“…?“
“우리는 기자가 아니잖아. 사실을 전달할 필요가 뭐 있어. 연예인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전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잖아.”
“….”
“그냥 사람들이 좋아하면 돼. 그럼 우리도 좋고, 연예인들도 좋은 거야”
소름 돋게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건, 당시 A나 나나 아직 방송국 물에 덜 쩌들은 초짜들이었기 때문일 거다. A가 오래된 우상 문희준에게 실망해서가 절대 아니고, 우리가 일찌감치 이 직업에 환멸을 느껴서가 절대 아니다. 그저 공부만 하던 학생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목격하게 되는 세상의 이치가, 책에서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데서 오는 충격이자, 새로운 깨달음이다. 오죽하면 ‘방송국 놈들’이란 말을 하겠는가. 그중에서도 더 센 충격과 더 큰 깨달음들이 많이 쏟아지는 곳이, 바로 이 바닥. 방송국이다.
하지만 이건 여느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일 터다. 모두에게 투명하고 공개 가능한 솔직한 프로젝트는 있을 수 없고, 위아래로 모두에게 인정받는 좋은 선배이자 후배는 흔할 수 없다. 적당히 적당히. 성과로 말하고 돈으로 받아 가는 것. 그게 직장이고, 사회다.
어느덧 10년 차 이상 고인 물이 된 A와 나는, 이젠 더 이상 이런 고차원적인(?) 대화 따윈 하지 않는다. 그저 촬영하고, 그저 편집한다. 그리고 방송한다. 어떻게든 더 높은 시청률과 많은 조회수를 얻기 위해 주어진 재료들로 더 많은 웃음을 끌어내고자, 더 많은 약을 판다.
‘대중들이 우리 프로그램을 보고 즐거워하면 된다. 행복하면 된다. 이게 우리의 선함이다’라며.
“카톡”
며칠 후 A에게서 사진 한 장이 왔다.
뭐지. 티켓… 유연석… 팬 미팅???
“뭐야…. 섭외하러 가? 유연석 유연석 노래를 부르더니 뭐라도 들이밀 거야?”
“아니 섭외는 무슨. 나 그냥 팬으로 가는 거야”
“아니 10대세요? 주접 좀 그만 떨어. 낼모레 마흔이야…”
“아니 뭐 내가 17세 남돌 좋아한대? 나보다 오빠고! 미혼인데 뭐 어때!!”
“아 창피해. 뭘 이런 걸 돈 주고 가?!!!”
“일로 만나면 뭔가 내가 또 슬퍼질지도 모르잖아. 난 그냥 내가 원할 때, ‘내가 보고 싶은’ 유연석만 볼래. 난 지금 너무 행복해”
아. 그렇지.
비록 만질 수 없어도,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진짜 그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저 바라만 봐도 행복한 사람이 있지.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많은 이들의 기쁨이 되어주는 사람.
누군가의 힘든 하루를 웃게 만들어주는 사람.
그게 연예인들이 가진 힘이고, 선한 영향력이다.
자살까지 시도했지만, 아이유의 가사 한 줄에 살아낼 용기가 생겼다는 청년부터,
‘건강검진 받으라’는 임영웅의 말 한마디에 당신도 모르고 있던 암을 조기 발견한 할머니까지.
누군가의 팬이었던 그들은, 저마다의 연예인 덕에 건강해졌고, 행복해졌고, 다시금 삶을 얻었다.
연예인은 연예인일 때 가장 많은 이들에게 아름답다.
가수는 무대에서, 배우는 극 중에서, 개그맨은 관객 앞에서.
그런 의미에서 웃을 일 없는 메마른 나의, 아니 A의 일상에 새로 침투한 연예인이란 존재는 누가 되었건 옳다.
그가 진짜 성실한지, 정말 배려심이 많은지, 재주가 많은지. 안연석(본명)은 모르겠지만, 유연석은 무조건 옳다.
입사 10년 넘어 드디어,
너의 진짜 연예인을 만난걸 축하하며. (하지만 얼마나 갈지는 두고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