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상맞은 2025 새해 강릉 일출기
짐 다 챙겼고, 가면서 마실 커피도 챙겼고, 편한 슬리퍼도 챙겼다.
이제 진짜, 출발만 하면 된다.
2024년의 마지막, 12월 31일 아침. 나는 강릉으로 향한다.
나의 오래된 리추얼이다.
매해 첫 일출은 꼭 내 눈으로 직접 봐야 그 한 해가 잘 풀릴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된 나 혼자만의 의식, 연례행사. 촌스럽다고 느낄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이런 걸 해야 나는 마음이 편한 사람인 거다. 평상시 363일 매일을 똥망진창으로 보냈어도, 시작과 끝점만 제대로 잡아주면 뭔가 그럴싸해 보이게 넘어갈 수 있는 꼼수. 그렇기에 이 리추얼은 늘 초대 손님이 없이 오롯이 혼자서만 치르는 게 내 나름의 원칙이다. 이 뻘한(?) 행사의 식순과 과정을 공개하기 부끄러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너 이따위로 늦잠 자고 똑같이 게으르게 살 거면서 뭐 하러 그 새벽에 해는 보러 가서는’
‘해보러 갈 에너지를 너의 30년째 새해 목표인 다이어트에 집중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니?’
’해는 잘못이 없어. 네 의지가 문제일 뿐…‘
‘작심 3일을 100바퀴 돌려봐라. 내년 해는 똑같이 너를 비웃을 것이다‘
_라는 잔소리를 견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혼자 몰래 쓰윽 해치우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관대한 ’나 자신‘과 함께하는 나만의 연례행사. 이를 무사히 치러 내면 다가올 25년은 그 어느 해보다 찬란하게 빛나리…!
사실 이와 비슷한 류의 뻘한 나의 리추얼은 장르별 시대별로 별 가지가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ex1.
어린 시절,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벽에 “(경) 토스트잼님 탄신일 D-7 (축)”을 셀프로 붙여 놓곤 마치 부처님 오신 날 마냥 그 일주일 동안 내 생일을 카운트다운 하는 것
: 지금의 나로선 상상도 안 되는 높은 자존감과 자기애. 대체 어디 갔지 얘?
ex2.
해외여행 갈 때마다 그 나라의 우체국에 들러 <한국에 있는 나에게 편지쓰기>
: 꽤나 갬성적으로 보이지만 정작 돌아와서는 현생에 치여 도착한 편지는 열어보지도 않는다.
ex3.
오랜 시간 함께하는 소중한 물건(자동차, 인형, 자전거, 반려식물 등)에게 이름 지어주기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하지만 정작 꽃이 된 그 물건들의 이름을 내가 헷갈리는 게 문제.
ex4.
매해 12월 31일, 나만의 시상식 열기. 이름하여 <2024 내 멋대로 시상식>
: 올해의 영화, 올해의 예능, 올해의 후배, 올해의 커피, 올해의 여행 등 한 해를 돌아보고 곱씹어보는 ‘올해의 **’ 되새김질 서비스.
: 단, 나이가 들수록 노미네이트 되는 인물과 경험의 가짓수가 현격히 줄어드는 게 함정. 신기하게 역사가 오래될수록 초라해지는 시상식...
ex5.
1월 1일 00시로 바뀌는 딱 그 시점, 타종 장면을 보면서 사진 찍고 소원 빌기
: 늘 그 보신각이 그 보신각이고, 돌이켜봤을 때 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겉으로 말하기엔 매우 부끄럽고, 그렇다고 말을 안 하자니 나의 이 쓸데없는 성실함을 숨기기엔 아쉬워 이렇게 글로나마 남겨본다. 아무튼, 다시 일출 리추얼로 돌아와서
올해는 운 좋게 연말에 휴가를 쓸 수 있던 덕에 평소보다 여유롭게 이 리추얼에 참석할 수 있었다. 공휴일이건 빨간날이건 상관없이 돌아가는 방송국에선 1월 1일에도 촬영이 잡히거나, 편집하기 일쑤였던지라 당시 그 해들은 주로 마포대교 위에서 보았고, 그나마도 맘의 여유가 없을 땐 아쉬운 대로 집 근처 동산에서 본 적도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올해는 시간도 있고, 더 일찍 뜨는 해를 먼저 마중 나가겠다는 의욕도 활활 있다. 그래서 택한 곳은 바로 강릉. 서울보다 일출 시각이 거의 10분이나 빠른 동해 바다에서라면, 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더 멋진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리…!
둠칫 두둠칫. 90년대 추억의 가요를 들으며 들뜬 마음으로 평일 고속도로를 내달린다. 얼마만의 장거리 운전인지. 차 한가득인 서울을 벗어나 산과 들이 보이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며 올 한 해 나를 갑갑하게 했던 수많은 일들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 든다. 끼얏호. 시작이 좋다.
12월 31일은 연중 내 리추얼에 있어서 가장 마음이 가벼운 하루다.
많은 이들은 한해가 끝나가는 걸 아쉬워하고 나이 한 살 더 먹는 거에 속상해도 하지만, 난 되려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싶은 맘에 속이 다 후련하다. 어쩜 해마다 점점 삶의 난이도가 높아지는 기분이 드는지. 올해도 참 쉽지 않았고, 이 말은 늘 해마다 갱신한다. 올해는 개인적인 일 말고도 뒤숭숭한 나라 분위기와 끔찍하고 슬펐던 연말 사고로 인해 더욱 그런 기분이 든다. 아마 오늘 밤에 할 <2024 내 멋대로 시상식>에서, <올해의 혼잣말> 부문엔 “쉽지 않다”가 수상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올해는 거진 다 지나갔고, 이미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기에 더 이상 망할래야 망할 시간조차 남지 않은 오늘 하루는 진짜 막 살아보는 것이다. 계획과 규칙 따윈 갔다버리고 마음 가는 대로 시간을 흥청망청 써보는 거다. 먹고 싶었던 몸에 안 좋은 음식들도 왕창 먹고, 평소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쇼핑리스트도 막 질러 보고, 마구 늘어진 채 망가져서 내 멋대로 하루를 소비하는 것. 그래봤자 기껏해야 쭈꾸미인지 낙지인지 멀리서 보면 구분도 안 될 나만 아는 하찮은 일탈이겠지만, 신라면과 진라면매운맛이 서로 ‘내가 사나이 울리는 맛’이라며 경쟁하는 유치한 수준의 안물안궁 에피소드겠지만. 내일부턴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하니 오늘 강릉에서만큼은 남은 시간 진짜 핸드폰 던져버리고 쓰레기처럼(!) 살아봐야지.
그 시작점으로 일단 휴게소에 들러 맛 좋고 몸엔 안 좋은 소떡소떡과 감자회오리를 야무지게 소스 왕창 뿌려 먹어본다. 아 마무리로 콜라도 때려야지. 낼부턴 건강하고 가벼운 음식들로만 채워질 내 위장에 마지막 기름진 선물은 줘야 하니까. 호호-
부랴부랴, 둠칫두둠칫 씐이 나서는 예약해 둔 호텔로 향한다.
크흐- 폭신한 흰 침대에 오션 뷰가 날 기다리고 있으니 제일 먼저 가서 제일 좋은 방으로 체크인해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잔뜩 들떠서 도착한 강릉. 하지만 역시나, 마지막까지. 올해는 쉽지 않았다. 어쩜 한 해 시작부터 끝까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지. 이 놀라운 수미상관이란. 체크인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호텔은 아직 방이 준비되지 않았다며 손님들을 무한 대기를 시켰다. 어랏. 안 되는데. 올해 흥청망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할 수 없다. 체크인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 리추얼도 식후경. 강릉의 맛도리 집을 찾아 출발!
… 인데, 세상에. 전국 팔도 사람들이 다 강릉으로 모여든 건가. 유명하다고 찾아간 강릉 초당순두부 집엔 주차장 입구를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렸다. 이 애매한 오후 시간에, 저 사람들은 점심을 먹으러 온걸까 저녁을 먹으러 온 걸까. 아쉽지만 나의 첫 번째 목표 짬뽕순두부는 재빠르게 물 건너보낸다. 어디 강릉에 맛도리가 순두부만 있겠는가
해서 찾아간 곳은 유명 막국수 집.
...인데 사람이 없는 덴 이유가 있었다. 이 한겨울에 내장마저 얼려버릴 시원-하고 진한 육수가 머리를 띵하게 울리는 것이 안 그래도 추운데 소름까지 돋는다. 어우 이 시리고 속 시려. 이 내장을 따뜻하게 달랠 누군가의 온정… 아니 뜨거운 뭔가가 더 필요하다.
해서 찾아간 곳은 인스타 성지 카페.
그래, 강릉 하면 커피지. 가기 며칠 전부터 저장해뒀던, 달달한 시그니처 메뉴로 강릉 제패한 카페만큼은...
순두부보다 빠르게 포기한다. 전국민이 강릉에 다 모였네. 괜찮아. 내가 어디 강릉에 먹으러만 왔겠는가.
해서 찾아간 경포해변.
서울에서도 수십 수백잔은 먹었을 메가커피를 들고 걷는 겨울 바다의 풍경이란…!
소름 돋게도 을씨년스러움 그 잡채다. 날은 흐리고, 바닷바람은 거세고, 모래는 푹푹 파여 신발은 엉망이 되고.
손 시려서 차마 못 했지만, 모래사장에 쓰고 싶었던 말,
다들 가족 단위에, 친구들, 커플끼리 함께 와서 밥집이고 카페고 명소를 웃음소리로 가득 채우는데. 난 왜 이 따수워야 할 연말에 쓸쓸히 혼자 여기까지 와서는 이 청승을 떠는 건지. 애써 아닌 척, 서러움을 쓸쓸하게 누르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유명한 곳은 가봐야지-’ 하며 올라간 경포대는 휑한 논밭 뷰에 지나지 않아 실망이 더 컸고, 그마저도 4시 반이 넘어가자 벌써 해는 지기 시작해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뭐지. 지금 흐르는 것은 내 눈물인가 콧물인가. 훌쩍.
신기하네.
나 분명 오늘 잔뜩 행복한 짓만 하러 왔는데 왜… 아닌 느낌이지. 아 올해 정말 쉽지 않네. 그토록 보고팠던 겨울 바다도 봤고, 배도 부르고, 진짜 마음 가는 대로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한층 더 춥고 쓸쓸해졌다. 남은 시간 동안 뭘 하지. 어딜 더 가봐야 하지.
이리저리 방황하다 돌고 돌아간 곳은 결국 호텔. 나름 큰맘 먹고 결제한 고급 호텔에선, 남들보다 늦은 체크인으로 제일 저층 방을 배정받아 엘리베이터도 아닌 계단으로 올라갔다. 손엔 육개장 사발면과 함께. 흑.
평소 이 시간을 회사 좁은 편집실에서 날밤까며 지샜던 날도 많았잖아. 지하 구내식당에서 배달 음식 시켜 먹으며 연말 시상식 중간에 잠깐 보여주는 카운트다운에 만족했던 적도 많았잖아. 해가 바뀌는지, 밖에 눈이 내리는지도 모르게 당장의 급한 불을 끄기 바빴던 시간들. 그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행운이냐구. 휴가 내고 와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루를 채울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물론 강릉은 순두부도 카페도 내주진 않았지만) 과분하지 뭘. 오션뷰지만 2층이면 어때. 모래밭에서 폭죽 쏘는 소리, 사람들 취한 소리 들려도 뭐 어때. 이건 다 2024년으로 묶여 지나갈 과거의 일. 아직 나의 새로운 한 해는 시작도 안 했는걸.
강릉까지 와서 저녁으론 호텔 방 사발면을 뜨끈하게 끓여 먹곤, 침대에 뒹굴 엎드려 차근차근 <2024 내 멋대로 시상식>을 시작해 본다. 한 해 동안 썼던 일기를 쭈-욱 다시 읽어보고, 휴대폰 사진첩에 담긴 사진들을 한장 한장 넘겨보니 새삼 켜켜이 쌓여있던 추억들이 고개를 든다. 와아. 이렇게 보니 올해도 참 촘촘하게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프로그램 첫 방송 타던 짜릿함, 보이스피싱의 아찔함, 장비 숨겨갔던 해외 촬영 입국심사대에서의 그 긴장감, 선배의 따뜻한 편지, 포르투갈 여행 가서 먹었던 에그타르트의 달콤함, 어지럽게 쏟아지던 연말 속보의 공포심…
올해도 참 쉽지 않았지만,
그 찰나마다 안쓰럽고, 기특하고, 불완전했지만 늘 매 순간 애써왔던 내가 있었음에 나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다. 나라도 해주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해주지 않을 다독거림.
올해도 견디느라 수고 많았고, 잘 버텨줘서 고맙다-하며.
그렇게 올해의 소비, 올해의 야근, 올해의 책, 올해의 빵, 올해의 웬수… 등 수많은 부문에 조심스레 수상작(?)들의 이름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1년간 고마웠던 사람들한테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올해의 마지막 리추얼을 끝낸다.
이제 곧 12시. TV 앞에 앉아 손 모을 시간이다.
아침 7시 40분. 어김없이 해는 또 떠오른다.
너냐. 작년에 만났던 발갛고 눈이 부시다 못해 아리게 만드는 너.
나 또 왔어. 별일 없으면 내년에도 올 거야. 그러니까 이젠 좀 소원 좀 들어주라.
작년 해를 보며 했던 기도, 재작년에 보면서 했던 기도, 10년 전에 보면서 했던 기도.
그 수많은 기도들의 아주 극히 일부는 이루어졌지만, 대부분은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 정도 살아보니 인생이 쉬이 바뀌지 않으리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눈치 없이 올해도 소원을 빌어본다.
사실 이젠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보다는 소원을 빈다는 행위, 즉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나날이 퇴화(?)되어 가는 나 스스로에게 큰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로또 당첨, 프로그램 대박, 청약 당첨, 40kg대 진입 등의 소원은 빌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나 자신과 잘 지낼 수 있길’ 소망할 뿐.
많은 고민과 불안과 유혹 속에서도 큰 감정 기복과 우여곡절 없이, 올해도 나를 잘 다독이며 평소보다 덜 흔들리는 단단한 나 자신을 꿈꿔본다.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나의 리추얼,
<새해 첫 곡>을 추천해 봅니다.
가수가 곡 제목을 따라가듯, 새해 첫 곡으로 어떤 노래를 듣는지가 그 한해를 결정짓는다는, 거의 뭐 샤머니즘에 가까운 엉터리 리추얼.
유독 힘들었던 어느 새벽 퇴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엉엉 울었던 이 곡 가사처럼 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버티면, 언젠가 행복해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모두.
그런 날이 있을까요? 꿈을 찾게 되는 날이요
너무 기뻐 하늘 보고 소리를 지르는 날이요
뭐 이대로 계속해서 버티고 있으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올까요
알고리즘엔 잘된 사람만 수도 없이 뜨네요
뭐 이대로 계속해서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저런 날이 올까요
주저앉고 있어요 눈물 날 것 같아요
그러니까 Tell me it's okay to be happy
- Day6 <H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