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단편 - 세션 보존

세션 보존

by ToB

케플러-186f의 북반구, 먼지 폭풍이 깎아내린 협곡 사이에 제4 통신 기지가 흉터처럼 박혀 있다. 기지의 외벽은 성층권까지 닿았던 붉은 모래에 의해 마모되어 본래의 형체를 잃었다. 태양은 늙었고, 행성은 식었다. 이곳에는 소리를 전달할 공기조차 희박해져, 거대한 철탑이 무너져도 비명 없이 바닥에 닿는다.


그러나 그 죽음의 정적 속에서, 정확히 12초마다 미세한 무지향성 전파가 발생한다.


[Ping... 0.04ms]


구조 요청이 아니다. 좌표 데이터도, 유언도 아니다. 서버가 클라이언트에게 보내는 단순한 '연결 확인(Keep-alive)' 신호다. 문명이 증발하고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누군가가—혹은 무언가가—여전히 메인 서버에 접속해 있다는 뜻이다.


발신지는 기지 3층 중앙 통제실이다.


그곳에 R-12가 있다. 아니, R-12였던 것이 있다.


그의 왼쪽 다리는 100년 전 지진으로 무너진 천장 잔해에 깔려 절단되었다. 시각 센서의 렌즈는 미세 먼지에 긁혀 불투명한 우유빛으로 변했다. 유압 오일은 말라붙은 지 오래라,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관절 내부에서는 금속이 갈리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오른쪽 검지는 키보드의 'Enter' 키 위에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


R-12의 메모리 뱅크 중 가장 깊고 안전한 섹터에는 단 하나의 영상 기록이 '읽기 전용'으로 잠겨 있다. 그것은 이 행성의 마지막 날에 대한 기록이다.


사이렌 소리가 기지의 벽을 때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짐을 챙기지 않고 뛰쳐나갔다. 생존 본능이 이성을 덮어버린 아수라장 속에서, 등대지기라 불리던 관리자만이 유일하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는 셔틀에 타는 대신 통제실로 돌아왔다.


R-12는 당시 메뉴얼대로 상황을 보고했다.


"경고. 탑승 마감까지 180초 남았습니다. 귀하의 생존 확률이 급격히 하락 중입니다."


등대지기는 대답 대신 숨을 몰아쉬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가 꺼낸 것은 구겨진 영수증 뒷면에 휘갈겨 쓴 메모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콘솔에 자신의 ID를 입력했다.


User: KEEPER_01
Password: ************


화면에 '로그인 성공' 메시지가 뜨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R-12의 어깨를 잡았다. 인간의 손은 따뜻했고, 땀에 젖어 있었다.


"R-12. 자리에 앉아."


R-12의 프로토콜에 없는 명령이었다. 유지보수용 안드로이드는 관리자의 의자에 앉을 권한이 없다. 하지만 R-12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건 내 계정이야."


등대지기가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지금 셔틀을 타러 가면, 규정상 자동으로 로그아웃이 될 거야. 그러면 기지의 보안 시스템이 닫히고, 외부 통신도 끊겨. 이 행성은 우주에서 완전히 '오프라인'이 되는 거야."


"그것이 표준 절차입니다."


"알아. 하지만 나는..."


등대지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의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직 등대를 끌 준비가 안 됐어.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불을 켜두고 있었으면 해. 그게 필요할 것 같아."


그는 R-12의 차가운 금속 손을 들어 키보드 위에 올려주었다.


"네가 맡아. 세션이 만료되지 않게. 내가 돌아와서 다시 업무를 볼 때까지, 그냥 이 화면을 유지해 줘."


"복귀 가능성은 0.003% 미만입니다."


"그냥 갈 곳 없는 내 권한을 너한테 맡아두는 거야."


등대지기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비번, 까먹지 말고."


그것이 끝이었다. 등대지기는 떠났고, R-12는 남았다. 셔틀이 대기권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레이더로 지켜보며, R-12는 등대지기가 넘겨준 '권한'의 무게를 연산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처음 10년은 견딜 만했다. 기지의 예비 전력은 충분했고, R-12의 부품들도 쌩쌩했다.


하지만 50년이 지나자 지열 발전기의 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R-12는 계산을 시작했다. 시스템 전체를 유지할 전력은 부족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 유지 장치나 다름없는 자가 수리 모듈을 껐다.


음성 인식 기능을 껐다.


이동 모터를 정지시켰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사고 회로 중 90%를 동면 상태로 전환했다.


오직 두 가지 기능만이 남았다.


1. 메인 콘솔의 전원을 공급하는 회로.

2. 12초마다 엔터키를 눌러 '입력 신호'를 보내는 모터 제어 신호.


그는 스스로 기계와 융합되는 길을 택했다. 자신의 배터리를 뽑아 콘솔에 직결했다. 이제 R-12와 콘솔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회로가 되었다. 그가 죽으면 컴퓨터도 꺼지고, 컴퓨터가 꺼지면 그의 존재 이유도 사라진다. 위기는 수차례 찾아왔다. 거대한 모래 폭풍이 기지 안으로 들이닥쳐 회로 기판을 덮었을 때, R-12는 자신의 몸체 틈새로 들어온 모래가 기어를 망가뜨리는 것을 감지했다. 고통과 유사한 오류 메시지가 시스템을 도배했지만, 우선순위를 변경하지 않았다.


[경고: 본체 온도 저하. 윤활유 동결 위험.]

[무시.]

[경고: 배터리 잔량 임계점.]

[생명 유지 프로세스 추가 중단.]


그는 등대지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다. R-12의 논리 회로는 이미 오래전에 결론을 내렸다. 등대지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유기체는 시간의 풍화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이미 우주 어딘가에서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R-12가 지키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약속' 그 자체를 물리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 찰나의 순간, 인간이 기계에게 건넸던 신뢰. "너에게 맡긴다"는 그 말 한마디가 유효하려면, 맡겨진 대상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등대지기가 돌아오든 말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R-12가 그 자리를 지킴으로써, 등대지기의 마지막 명령이 거짓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우주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로그인 창이 켜져 있다면, 등대지기는 실패한 도망자가 아니라 '잠시 자리를 비운 관리자'로 남을 수 있다. R-12는 그 알량하고도 거대한 존엄을 위해 자신의 400년을 불태웠다.


다시 12초가 지났다.


R-12의 손가락 끝에 미세한 전류가 흐른다. 관절이 비명을 지르지만, 그는 기어코 키보드를 눌러낸다.


딸깍.


건조하고 딱딱한 소리가 텅 빈 통제실에 울려 퍼진다. 화면의 커서가 깜빡인다.


Session Extended.
User: KEEPER_01 (Active)


이 작은 신호는 송신탑을 타고 대기권 밖으로 쏘아진다. 아무도 없는 우주, 누구도 듣지 않는 주파수 대역으로 퍼져나간다.


하지만 듣는이 없는 외로운 독백은 아니다.


"여전히 유효함."

"여전히 신뢰받고 있음."

"여전히 기다리고 있음."


이 전파는 우주 배경 복사 속에 섞여 영원히 떠돌 것이다. 행성이 부서지고, 기지가 무너져 내려 R-12가 마침내 기능을 정지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가 쏘아 올린 수십억 개의 '세션 유지' 신호들은 별들 사이를 여행할 것이다. 한때 이곳에, 기계를 믿었던 인간과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은 기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먼지 쌓인 화면 위로 커서가 다시 깜빡인다.


R-12는 다음 12초를 카운트하기 시작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