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 현실의 사이
SF 소설을 집필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사실성과 상상력 사이의 균형이다. 나는 이과에 공학도이고, IT 분야의 직무를 맡고 있지만 물리학이나 수학 전공자는 아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조금은 느슨한 과학과의 커플링 속에서 나의 상상과 공상이 시작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쓰다 보면 물리학과 공학의 정합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압박에 직면한다.
독자가 "저건 불가능하다"라고 느끼는 순간, 서사의 신뢰도는 무너진다. 동시에, 철저히 현실의 과학에 발을 묶어둔다면 더 이상은 픽션에 머무르지 못하고 논픽션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나는 종종 '외삽'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현재의 과학적 사실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 선을 조금씩 더 멀리 그어본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르는 영역으로 발을 디뎌본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약간의 비약이 발생한다. 이를테면 '각인된 요람'의 후성 마커처럼 현재 후성 유전학의 연구 결과를 일부 따오면서도, 유전적인 분석이 완벽히 가능해서 마커의 추적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식이다. 독자가 "저건 아직 없지만, 있을 법하다"라고 느끼면 이런 비약은 용납되고, 이야기는 비로소 살아난다.
결국 SF를 쓴다는 건 과학적 정합성을 수호하는 일과, 독자를 새로운 세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적절한 오차를 조절하는 일이다. 내 공상 속의 세상은 언제나 이 두 축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 진동은 SF를 읽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레는 떨림이라 생각한다.
그 진동과 떨림이 독자들의 마음과 동화되어 맑은 소리로 공명하기를 바란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