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 포커스와 통찰력

과집중과 마비의 줄타기

by ToB

새벽 2시, 방 안은 고요하다. 모니터 불빛만이 어둠을 밀어내며 공간을 지배한다. 화면 가득 펼쳐진 수백 줄의 코드, 그 위에서 손가락은 멈추지 않는다. 세상의 소음은 사라지고, 오직 나와 문제만이 남는다. 시간은 의미를 잃고, 몇 시간은 몇 분처럼 스쳐간다. 며칠을 붙잡고 씨름하던 오류가 풀려나가는 순간, 전신을 휘감는 희열. 그것이 바로 ‘과집중(Hyperfocus)’ 상태의 나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또 다른 내가 고개를 든다. 화면에는 팀장이 요청한 주간 보고서가 떠 있다. 고작 대여섯 줄, 10분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는 문서다. 그러나 그 하얀 화면은 에베레스트처럼 아득하고, 키보드는 납덩이처럼 무겁다. ‘해야 한다’는 생각은 머릿속을 맴돌지만 손끝은 움직이지 않는다. ‘왜 이것도 못하지?’라는 자책이 소용돌이치며 나를 마비시킨다. 이것이 ‘ADHD 마비’다. 단순한 행정 업무 앞에서 무기력에 짓눌리는 또 다른 나다.


이 두 모습은 단순히 컨디션의 차이가 아니다. ADHD를 가진 개발자로서 매일 마주하는 인지적 모순이다. 나의 뇌는 흥미롭고 새롭고, 도전을 자극하는 과제 앞에서는 폭발적으로 질주한다. 복잡한 알고리즘을 해체하거나 누구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일은 나의 도파민 회로에 최고의 연료다.


그러나 직장인의 삶은 질주만으로 버틸 수 없다. 보고서 작성, 이메일 회신, 경비 처리 같은 과제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단조롭고 반복적이며 즉각적인 보상이 없는 이 일들은 나의 뇌가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영역이다.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방법을 아는 데도, 심지어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실행 기능은 멈춰 서 버린다.


이 이중성은 직업적 삶에 큰 파장을 남긴다. 동료들은 묻는다. “그 어려운 건 잘 하면서, 왜 이렇게 간단한 건 안 해?” 나는 속 시원히 대답하지 못한다. 게으르다, 성의 없다, 이런 오해는 쉽게 따라붙고, 나 스스로도 자괴감에 빠진다.


그래서 나는 생존 전략을 배워야 했다. 마감 직전의 압박감이 던져주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에 몸을 맡기는 ‘벼락치기’, 뽀모도로 같은 시간 관리 기법으로 뇌를 속이는 방식, 동료와 함께 일을 하며 ‘사회적 압박감’을 동력으로 삼는 방법. 간단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많은 정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과정이다.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의 이면에는, 이렇게 사소한 과제들과 매일 벌이는 전쟁이 있다.


ADHD 개발자의 삶은 양극단을 오가는 줄타기다. 경이로운 몰입의 순간이 주는 성취감과, 사소한 과제 앞의 무력감이 주는 좌절감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이중성을 내 일부로 받아들이려 한다. 내 뇌는 결함이 아니라, 그저 다른 운영체제를 가진 특별한 시스템일 뿐이다. 복잡한 구조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과, 단순한 보고서 앞에서 얼어붙는 무력감은 모두 같은 뇌에서 비롯된 두 얼굴이다. 오늘도 나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나의 길을 걸어간다.



이전 01화어린 시절의 나, 그리고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