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성의 역산에 관하여
제목: 양자 공명 맵핑을 통한 EVS 환자의 개체성 연구
저자: 김 박사, 전(前) 서울 신경과학 연구소 선임 연구원
기고일: 2042년 10월 28일 (데이터 봉인됨)
본 문서는 ‘존재감 상실 증후군(Existential Vacancy Syndrome, EVS)’에 대한 5년간의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 EVS는 환자가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 감정, 심지어 단편적인 운동 기술까지 자신의 의식에 비자발적으로 침투하는 현상을 겪는 희귀 정신질환으로, 기존의 모든 정신의학적 범주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본 연구팀은 차세대 뇌 스캐닝 기술인 ‘양자 공명 맵핑(QRM)’을 통해 EVS 환자들의 뇌 신경 기질(neural substrate) 심층부에서 공통적인 인공적 패턴을 발견하였다. 이 신호의 정체는 개체를 식별하기 위해 각인된 데이터 블록, 즉 ‘일련번호’였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EVS 환자군 전체가 시공간적으로 아무런 유전적, 환경적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동일한 일련번호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고는 EVS가 정신 질환이 아닌, 동일한 식별자를 가진 복제된 개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양자적 혼선(Quantum Crosstalk)’ 현상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 가설은 인간의 개체성과 자아의 고유성에 대해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탐구하며, 해당 개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윤리적 책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무거운 과제를 남긴다.
신경과학자로서 나의 커리어는 하나의 확고한 신념 위에 세워져 있었다. '자아'란 두개골 안에 갇힌 1.4킬로그램짜리 뇌가 벌이는 가장 위대한 마술 쇼라는 것. 기억, 사랑, 신념, 개성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결국 뉴런의 전기화학적 발화 패턴이 빚어낸 정교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굳게 믿었다.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고, 개체성의 신성함이란 인본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감상적인 허상이라 여겼다. '존재감 상실 증후군(EVS)' 환자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모든 것은 '환자 17'로 명명된 52세의 건설 노동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평생 서울의 잿빛 먼지 속에서 부대껴온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잠에서 깨어 ‘부산 자갈치 시장의 비릿한 새벽 냄새와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며 극심한 공포 속에서 나를 찾아왔다. 단순한 꿈보다 훨씬 더 깊은 층위로 다가오는 경험. 그는 축축한 해무가 피부에 닿는 감각, 생선 비늘을 긁어내는 소리, 상인들의 걸걸한 사투리까지 모든 것을 '경험'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는 평생 부산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기억 필름을 자신의 회상 속에 잘못 끼워 넣은 것 같다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사례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환자 23', 강릉의 중학교에서 첼로를 가르치는 40대 여성이 내원했다. 그녀는 클래식 외길을 걸어온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 연습 중에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현란하고 공격적인 재즈 스케일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재즈를 혐오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낯선 리듬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이 강간당하는 느낌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가장 우려스러운 사례는 '환자 31'이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온화하고 내성적인 30대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이유 없이 찾아오는 극심한 분노와 폭력 충동에 시달렸다. 그녀의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지고, 누군가의 얼굴을 가격할 때의 충격과 고통이 환상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심지어 싸움에서 이겼을 때의 야만적인 희열감까지도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며, 스스로를 격리해달라고 애원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자신의 것이 아닌 경험이 ‘나’라는 영토를 무단으로 침범하고 있다는 끔찍한 감각이었다. 초기 우리 연구소의 주류 의견은 명확했다. 저명한 서 박사는 이를 '네트워크 사회가 낳은 새로운 형태의 집단 히스테리'로 규정했다. 미디어를 통해 타인의 경험이 과도하게 유입되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개인들이 타인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망상장애의 일종이라는 것이었다. 혹은 바이러스가 뇌의 기억 중추를 감염시켜 생겨난 이상이라는 가설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표준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뇌의 구조적 손상도, 화학적 불균형도, 바이러스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의 뇌는 너무나도 완벽해서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동료들의 비웃음과 연구비 삭감 압박 속에서 홀로 다른 가능성을 탐색해야 했다. 나는 그들의 호소가 망상이 아니라고, 그들이 겪는 고통은 실재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자아는 더 이상 견고한 성채로 분리되지 않았다. 수많은 균열이 생긴 댐처럼, 정체불명의 감정과 기억, 그리고 정체 모를 기술들이 쉴 새 없이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이 보이지 않는 균열의 정체를 밝혀내야만 했다.
기존의 뇌 영상 기술은 모두 뇌의 '활동'이라는 시끄럽고 난잡한 변화들을 기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fMRI는 혈류의 흐름을, EEG는 뇌파의 전기 신호를 포착한다. 하지만 EVS 환자들의 뇌를 검사한 결과는, 너무나도 정상적인 활동들을 담고 있었다. 나는 활동이 멈춘 후의 조용한 뇌의 '정적(靜寂)'을 들어야만 했다. 그 안에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직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