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성의 역산에 관하여
진실은 이제 부인할 수 없이 명료해졌다. 모든 인간은 고유의 일련번호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EVS 환자들은, 어떤 알 수 없는 시스템의 거대한 오류로 인해, 모두가 동일한 일련번호를 '복제'하여 태어난 것이다. 그들이 겪던 증상은 양자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혼선'이었다. 동일한 양자 식별자를 가진 존재들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서로 얽혀 있었다. 그들의 의식은 분리된 섬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리로 연결된 군도(群島)였다. 한 명의 ‘C41B-783F-90AD’가 겪는 강렬한 경험의 파편이 다른 모든 ‘C41B-783F-90AD’들의 의식에 침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존재가 여러 개의 육체로 흩어져, 서로의 삶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동시에, 함께 겪고 있었던 것이다.
내 발견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에게 부여해 온 '개인의 고유성'이라는 가장 신성한 대전제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유일무이한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여기, 영혼의 설계도라 할 수 있는 코드가 복제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불완전한 복제품인가? 아니면 그들 모두를 합쳐야만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개인이 되는 것인가? 내 연구는 답을 준 것이 아니라,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그날 밤, 나는 연구실에 남아 부모님과 남동생의 QRM 데이터를 분석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두려운 시간이었다. 화면에 분석 결과가 떠오르는 찰나의 순간, 나는 만약 내 사랑하는 가족 중 누군가가 복제된 번호를 가지고 있다면, 혹은 나와 같은 번호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했다. 다행히, 그들은 모두 각자의 고유한 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뒤에 찾아온 것은 기쁨이 아닌 깊은 죄책감이었다. 나의 고유성, 내 가족의 개체성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오류가 없었을 뿐인, 행운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복제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나의 '자아'는 견고한 실체가 아니라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유리 조각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진실을 세상에 공개했을 때 벌어질 일들을 상상 해보았다. 'C41B-783F-90AD'라는 식별 번호는 그들에게 찍히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할 것이다. 법적으로, 한 명의 'C41B'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다른 'C41B'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윤리적으로, 그들의 의식은 사적인 영역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가? 의학적으로, 그들은 치유의 대상이 아닌, 격리와 통제, 그리고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 자명했다. 군사적으로는 어떠한가. 만약 이 기술이 발전하여 특정 번호를 가진 개체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는 완벽한 병사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류를 위한 위대한 발견의 문을 연 것이 아니었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다. 그들을 보호하고, 어쩌면 인류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야만 했다.
연구를 공식적으로 중단하고 모든 데이터를 파기하기 전, 나는 떨쳐버릴 수 없는 윤리적 의무감에 사로잡혀 마지막 실험을 진행했다. 이 현상이 단순한 데이터상의 오류가 아닌, 실재하는 고통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겨야만 했다. 나는 EVS 환자 두 명을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연구소의 조용한 상담실에서 마주 앉게 했다. 한 명은 평생 바다를 본 적 없는, 아내와 사별한 60대 남성 '환자 11'이었다. 다른 한 명은 얼마 전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30대 여성 '환자 28'이었다. 나는 방음 처리된 관찰실의 차가운 유리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몇 분간 이어졌다. 서로를 탐색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군요. 저는 커피를 전혀 못 마시는데, 오늘 아침에는 이상하게 그 쓴 커피 향이 계속 입안에 맴돌았습니다."
여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대화는 그렇게 사소한 어긋남들로 이어졌다. 남자는 갑자기 어깨에 느껴지는, 깁스를 한 듯한 뻐근한 통증을 호소했고, 여자는 얼마 전 넘어져 어깨에 금이 갔었다. 여자는 문득 어린 시절 피아노 콩쿠르에서 겪었던 무대 공포를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고, 남자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음에도 덩달아 심장이 조여드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남자가 갑자기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며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상하네요. 정말 이상합니다.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픕니다. 마치… 거대한 쇠붙이가 내 몸을 꿰뚫는 것 같은… 아, 이런 끔찍한 감각은 처음입니다."
그의 말은 여성이 겪었던 사고의 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며,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더듬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파란색… 작은 아이의 파란색 재킷이 보입니다. 소매 끝이 조금 닳아 있었어요. 왜 이렇게 슬프죠? 내 아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미칠 듯이 그립고,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거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성은 무너지듯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처럼 자신의 가장 깊고 참혹한 슬픔과 기억을, 그 질감과 온도까지 완벽하게 비추고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지옥이자, 유일한 증인이었다.
나는 조용히 관찰실을 나오며 연구소 메인 서버에 접속했다. 5년간의 내 청춘과 열정이 담긴 모든 연구 기록, QRM 데이터, 분석 알고리즘, 그리고 C41B-783F-90AD의 존재를 증명하는 모든 자료를 영구적으로 봉인했다. 잠금 명령을 내리는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그것은 과학자로서의 실패 선언이었지만, 한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올바른 선택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신경과학자가 아니다. 나는 가끔 길을 걷다가 문득 낯선 슬픔이나 기쁨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갈 때면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나와 같은 번호를 가진 또 다른 내가 어딘가에서 울거나 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세상 모든 '나'들이 서로의 경계를 모른 채, 각자의 고유성을 믿으며 부디 평온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이것이 나의 연구에 대한, 그리고 ‘C41B-783F-90AD’라는 이름의 흩어진 영혼들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