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크리스마스 ep.6
해외여행을 결정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블로그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당장 수중에 쥔 돈이 넉넉하지 않으니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디지털 노마드'라는 매혹적인 단어로 향했다. 집에서도, 지구 반대편에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부업. 그중 가장 문턱이 낮은 것이 블로그였다.
밤마다 모니터 불빛 아래서 우리처럼 세계여행을 계획한 이들의 기록을 훔쳐보았다. 홍보 수익을 올리고, 책을 발간하며 여행이 곧 삶이 된 사람들의 모습. 나 역시 잠시나마 그런 근사한 삶을 꿈꿨다.
"뭐해? 아직 안 자고?"
등 뒤에서 들려온 덕구의 목소리에 황급히 창을 닫았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온 아내의 얼굴에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응, 우리 여행 기록할 블로그 좀 만들고 있었어. 일단은 아이들 재우고 나서 우리가 세운 계획부터 차근차근 올려보려고."
나는 아내를 옆에 앉히고 커다란 세계지도를 펼쳤다. 지도 위에는 우리가 한 번쯤 꿈꿨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베이징, 하노이, 두바이, 프라하, 런던, 핀란드의 오로라와 뉴욕의 빌딩 숲까지. 적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명단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적어 넣었던 도시 위로 하나둘 가차 없이 취소선이 그어졌다.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예산이었다. 퇴직금으로 받은 2천만 원 남짓한 돈과 아내가 가계 살림을 쪼개 정성껏 모은 1천만 원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우리가 없는 동안 나갈 관리비와 대출 이자 등을 떼어놓고 나니, 실제 손에 쥐고 떠날 수 있는 돈은 2천만 원 남짓이었다.
"6개월은 무리겠지?"
"응, 기간을 3개월로 줄이고 물가가 너무 비싼 곳은 다음을 기약하자."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수정했다. 꿈의 크기를 현실의 주머니에 맞게 재단하는 과정은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확정된 1차 루트가 완성되었다.
서울 → 도쿄 → 베이징 → 하노이 → 두바이 → 카이로 → 로마 → 부다페스트 → 프라하 → 파리 → LA → 하와이 → 서울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 가족의 거사를 앞두고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회의를 열기 위해서였다.
"자, 주목! 우리 이제 진짜 떠난다. 일본 가면 너희 좋아하는 가챠 마음껏 구경하게 해줄게. 중국에선 운동장보다 훨씬 큰 궁궐도 볼 거고, 이집트에선 진짜 피라미드를 볼 거야. 어때?"
내 설명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아빠, 진짜 피라미드 안에 들어갈 수 있어?"
"그럼, 가서 사진도 찍고 낙타도 타보자."
신이 나서 방방 뜨는 아이들을 보며,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아내의 얼굴에도 모처럼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통장 잔고를 계산하며 졸였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곧바로 '파워 J'의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확정된 루트를 기반으로 항공권 가격을 비교하고, 날짜별 이동 경로를 수립했다. 숫자로 가득한 엑셀 시트와 여행 안내서들이 책상을 채워갔다. 막막하기만 했던 길 위에 조금씩 이정표가 세워졌다. 이제 정말 떠날 시간이다.
모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