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크리스마스 ep.5
"무리야, 우리 형편에 무슨 세계일주야."
"아니,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자. 그냥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한다기보다 둥그렇게 한 바퀴 다녀온다고 생각해보면 되잖아. 일본 들렀다가, 미국 갔다가, 유럽 갔다가, 베트남이랑 중국 정도만 돌아도 세계일주라고 할 수 있지 않아?"
"말이 쉽지. 비행기 티켓이며 이것저것 생각하면 꽤 많이 들 거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덕구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나는 계속해서 우리 좀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오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지만, 금전적인 비용 말고도 우리 앞에는 꽤 많은 난관이 놓여 있었다.
가장 먼저 아이들의 문제였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최소 3개월 이상 학교를 비우게 되었을 때 생길 격차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낯선 나라와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과연 그 시간을 버텨줄 체력이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나 역시 반년 정도 버틸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 문제가 걸리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여행을 통해 얻는 경험이 큰 자산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자산을 위해 눈앞의 문제들을 외면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밤 어떤 선택이 더 나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고, 시간만 흘렀다. 그렇게 고민만 하던 끝에 2026년 1월, 나는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여행 계획은, 예상치 못한 사건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다만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나는, 결정을 미뤄둔 채 어중간한 일상 속에 머물러 있었다.
회사를 나오고 나니 시간은 넘쳤지만, 정작 내게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집안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을 잘게 쪼개 잡아먹었다. 아침에 빨래를 돌리고 간단히 청소를 한 뒤 설거지를 조금 하고 나면 빨래가 끝나기까지 10분이 남았다. 잠깐 쉬었다가 다시 건조기에 넣고, 또 5분 쉬었다가 아이들을 바래다주고, 다시 돌아와 빨래를 개는 식이었다. 애매한 공백들이 이어질 뿐, 마음 놓고 푹 쉬는 시간은 없었다.
그날도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첫째를 픽업하려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아들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라 아들을 부르며 달려갔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태연했고 우리 아들도 나를 보더니 크게 놀란 기색은 없었다.
"아들아, 무슨 일이야? 왜 무릎을 꿇고 있어?"
"아, 지수가 일본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산 포켓몬 카드가 너무 갖고 싶어서 달라고 조르고 있었어."
"뭐? 그런 거 있으면 아빠한테 사달라고 하면 되지!"
"한국에서는 안 판대. 아빠, 우리도 일본 가면 안 돼?"
아들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 장면을 본 나는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다른 아이들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아들아, 우리는 다음 달에 세계일주 갈 거야! 학교도 많이 못 갈 테니까 미리 친구들한테 말해놔."
"정말? 그럼 우리 일본도 가?"
"그럼. 일본도 가고, 미국도 가고, 유럽도 갈 거야."
아들은 금세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시작했고, 주변 아이들은 내게 중국도 가는지, 일본은 어디를 가는지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는 아들이 자랑하기 좋도록 허세를 잔뜩 부린 채, 아이를 학원으로 데려다주었다.
집에 돌아온 아들은 여전히 신난 얼굴로 동생과 엄마에게 이야기를 쏟아냈고, 덕구는 내게 왜 그런 말을 했냐며 타박했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우리 더 늦기 전에 다녀오자고 말했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장기간 빠지는 편이 오히려 이후 학업을 따라가기 쉽고, 같이 다니면서 역사도 알려주고 홈스쿨링으로 공부할 계획을 세워보자고 했다.
덕구는 여전히 부정적이었지만, 나는 방향부터 정한 뒤 문제는 하나씩 해결해보자고 했다.
아이들이 우리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는 걸 본 덕구가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가고 싶어?"
"네!!!"
"엄마가 시키는대로, 아빠가 말하는대로 잘 따라올 수 있겠어?"
"응응!!! 아빠 엄마 말 잘 들을거야"
"그래, 그럼 한 번 가보자 우리"
그렇게, 꼬박 1달을 망설이던 우리의 세계여행이 마침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