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크리스마스 ep.4
생각보다 시간은 빠르게 그리고 간결하게 흘렀다. 별다른 일이 없기도 했지만 일단 그만 두겠다는 나를 잘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없이 빠른 느낌이었다.
그렇게나 몸무게를 가지고 뭐라고 하면서 몸무게를 아침마다 재서 보고해라, 밥 먹을 때마다 직접 젓가락으로 음식을 옮겨 담으며 이건 먹고, 이건 먹지 마라 등등 관리랍시고 나를 괴롭히며 다른 사람들을 웃기던 부장님도 그 날 이후로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퇴사를 이야기하고 며칠 뒤 부장님과 면담이 있었다. 부장님은 혹시 자신 때문에 나가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차마 나쁜 말은 하지 못하고, 그렇지 않다며 다른 곳에서 일을 해보면서 나아지고 싶다는 이유를 대며 그만둔다고 했다. 부장님과 함께해서 감사했다는 말은 덤이었다. (이 말까지는 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퇴사는 부장님의 면담으로 사실상 확정되었고 이후부터는 정말 인수인계를 제외하고는 할 일이 없었기에 나는 어딜 여행가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인터넷 서핑을 하며 좋다는 휴양지도 검색하고 몇 가지 책도 구매하고 읽어보면서 아내가 좋아할만한 여행지를 찾았다.
매일이 나쁘지 않았다. 여행지를 검색하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고, 칼퇴를 하면서 계속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가까워진 관계도 만족스러웠다. 왜 진작 이렇게 일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정도로 일상은 평온했고 회사는 조용했다.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오고 이주일 정도 지났을 때 덕구는 내게 어떻게할 생각인지를 물었다.
'여행가자, 아주 오랫동안'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생각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생활비에 대한 대안이 없기도했고 퇴직금으로 다녀오자고 하기에는 빚이 많았다. 아내는 기본적으로 리스크를 싫어했다. 나는 '새로운 일을 구하려고'라는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딱히 반박하기 힘든 말을 내걸고 몇일을 더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덕구가 먼저 내게 여행을 제안했다.
"우리도 애들 데리고 어디 다녀올까? 자기 재취업하기 전에?"
"응? 어디로? 갑자기 왜?"
"글쎄, 나도 생각해보지는 않았는데 요즘 애들 주변에서 여기저거 놀러 갔다 오느라 유치원이랑 학교를 자주 빠지나봐, 갔다 온 애들이 자랑을 했는지 애들이 놀러가고 싶다는데 우리 아직 제대로 여행 가본 적이 없으니까 자기 재취업하기 전에 다녀오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좋지, 우리도 해외로 다녀올까?"
"해외로? 돈이 많이 들지 않을까? 애들 데리고 가능할지 모르겠네..."
어쩌다 보니 나온 여행이야기였지만 오래 전부터 고민했던 것처럼, 그리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는 깊게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내는 돈 때문에 제주도 여행을 생각했지만 나는 해외여행을 계속 이야기했고 아내도 이내 마음을 돌려 베트남, 태국 등 저렴한 동남아 휴양지를 중심으로 해외로 나가보자는 이야기도 시작했다.
"그럼 우리 서로 가고 싶은 곳을 조사해서 다음 주 토요일 밤에 이야기해보고 결정할까?"
그리고 그 주 토요일 밤까지 겨우 3일 정도밖에 없는 그 시간이 우리 가족에게는 아주 커다란 변곡점될 사건을 만들어 버렸다.
토요일 밤, 나는 덕구에게 폭탄 선언을 했다.
"우리, 세계일주를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