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함과 옹졸함 사이에서

여름날, 크리스마스 ep.11

by 씨이

오사카의 화려한 네온사인을 뒤로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웅장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중국 베이징, 공항에 내려 마주한 베이징의 첫인상은 '압도적'이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황제의 거처라는 자금성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벽과 황금빛 지붕을 보며 아이들도 연신 '우와!' 소리를 연발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거대한 규모에 나 역시 피로를 잊고 셔터를 눌러댔다.


"아빠, 여기가 진짜 황제님이 살던 곳이에요?"


라며 눈을 빛내던 아이들의 모습에 이번 일정 변경은 성공적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확신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산산조각 났다.

문제는 식탁 위에서 시작됐다. 베이징에 왔으니 제대로 된 현지 음식을 맛보여주고 싶어 유명한 식당을 찾았지만, 특유의 강한 향신료 냄새에 아이들은 젓가락을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남겨진 음식을 본 식당 아주머니들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주머니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들을 가리키며 중국어 특유의 높낮이가 강한 성조로 무언가 열정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섞인 영어로 유추컨대 '아이들이 왜 안 먹어? 입에 안 맞나? 어디 아픈 거 아니야?'라는 진심 어린 걱정처럼 느껴졌지만, 중국어를 모르는 아이들 눈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딸아이는 내 팔 뒤로 숨으며 속삭였다.


"아빠... 저 할머니 왜 우리한테 화내요? 우리가 음식 남겨서 혼나는 거예요? 무서워요..."


중국인들의 따뜻한 오지랖이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호통'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걱정해 준 아주머니들께는 죄송했지만, 잔뜩 겁먹은 아이들을 보니 더는 식당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아이들은 '그냥 숙소 가면 안 돼요?'라며 울먹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와야 했다.


허기진 아이들을 달래며 도착한 만리장성.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명성답게 산등성이를 타고 끝없이 이어진 성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곳은 그저 '지루하고 넓고 힘든 계단'일 뿐이었다.


처음 성벽에 올라섰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신기한 듯 좁고 가파른 계단을 전력 질주하며 숨바꼭질하듯 장난을 쳤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아이들을 놓칠까 봐, 혹은 가파른 계단에서 넘어질까 봐 나는 '안 돼! 위험해! 멈춰!'를 외치며 뒤쫓아가느라 진땀을 뺐다.


하지만 그 기세는 5분도 채 가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끝도 없이 이어진 성벽의 위압감 때문인지 아이들은 금세 풀이 죽어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딸아이는 다리가 아프다며 내 바지춤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빠, 여기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 숙소 가면 안 돼? 제발 호텔 가요..."


방금까지 뛰어다니던 에너지는 온데간데없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웅장한 풍경을 감상하기는커녕, 지쳐 쓰러진 아이들을 달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아찔한 만리장성의 기억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텅 빈 눈으로 창밖을 보는 아이들과 녹초가 된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 덕구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여보, 아이들이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하네.

우리 다음 일정도 계속 이런 도시 여행인데, 아예 방향을 휴양지 쪽으로 확 바꿔보는 거 어때?"


그 한마디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원래 계획은 베트남 하노이로 넘어가 다시 도시의 활기를 느끼는 것이었지만, 지금 우리 가족에게 절실한 건 '관광'이 아닌 '쉼'이었다.


"그럴까? 하노이 대신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수영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근데 베트남에 그런 곳이 있어? 나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그때 하노이 말고 푸꾸옥도 알아봤었잖아, 거기는 완전 휴양지였잖아"

"아! 그래, 괜찮겠다!"


내 대답에 '숙소 가고 싶다'며 울먹이던 아이들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스마트폰을 켜 베트남의 숨겨진 보석 같은 휴양지, 푸꾸옥(Phu Quoc)행 티켓을 검색했다. 대륙의 웅장함과 '무서운 성조'에 호되게 당한 우리 가족은 이제 정말 푸른 바다 앞에 누워 숨을 고를 차례였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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