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크리스마스 ep.12
베이징의 붉은 장벽이 주던 위압감을 뒤로하고, 우리는 숙소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내 손엔 스마트폰이, 아내 덕구의 손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급히 사 온 편의점 빵이 들려 있었다. 하노이행 티켓을 취소하고 푸꾸옥행 직항 노선을 검색하는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찾았다! 내일 오후 비행기 있어
푸꾸옥으로 가면 바로 바다 앞 리조트로 예약할게
거기 수영장 엄청 크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금 전까지 '집에 가고 싶다'며 눈물짓던 아이들의 눈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아빠, 진짜 수영할 수 있어요?"
"상어 나오는 바다예요?"
라며 쫑알거리는 아이들을 보니, 베이징에서의 고생이 벌써 절반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튜브며 물총 이야기를 나누며 신이 났고, 덕구와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구체적인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리조트 사진을 넘겨보며 계획을 세우던 덕구가 문득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여보, 나 궁금한 게 있어. 왜 나를 자꾸 '덕구'라고 불러?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가끔 보면 진심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예쁜 이름 놔두고 왜 하필 덕구야?"
평소라면 '그냥 입에 착착 붙어서 그렇지!' 하고 능청스럽게 넘겼겠지만, 낯선 타지에서 고생한 아내의 얼굴을 보니 문득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우리나라 옛날 미신에 그런 게 있잖아. 아이 이름이 너무 예쁘면 귀신이 시샘해서 데려간다고, 일부러 '개똥이'나 '쇠똥이'처럼 투박한 이름으로 불렀던 거. 그래야 병 안 걸리고 오래 산다고 믿었대."
내 뜬금없는 옛날이야기에 덕구의 눈동자가 커졌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당신이 너무 소중하니까, 괜히 남들이 샘내지 못하게 나만 아는 못난이 애칭으로 부르는 거야.
빡구니 덕구니 하면서 장난스럽게 부르다 보면, 왠지 당신이랑 이렇게 투닥거리면서 백 살 넘어서까지 오래오래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거든. 귀신도 '에이, 저 덕구는 안 데려가야지' 하고 그냥 지나치게 말이야."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내 대답에 덕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뭐야, 진짜 구식이다...'라며 핀잔을 주는 듯했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이미 옅은 감동의 일렁임이 보였다. 장난기 가득했던 방 안의 공기가 어느새 포근하고 몽글몽글하게 바뀌어 있었다.
덕구는 쑥스러운 듯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이내 내 허리를 꼭 껴안았다. 베이징의 매서운 바람과 '무서운 성조'에 잔뜩 얼어붙었던 마음이 그녀의 온기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내일 마주할 푸른 바다와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덕구'로서의 날들을 꿈꾸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