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큼은 아들데이

여름날, 크리스마스 ep.18

by 씨이

두바이의 뜨거운 정오, 얼어붙은 식탁 위에서 나는 결심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여행을 떠나왔는데, 내 아들의 구겨진 마음 하나 제대로 펴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아들, 오늘 남은 시간은 오직 '아들데이'야.

아빠가 결정 안 해. 네가 대장이야."


내 갑작스러운 선언에 포크를 만지작거리던 아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지유도 의아한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지유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지유야, 오빠가 그동안 지유랑 친구놀이 많이 해줬지?

오늘은 오빠가 하고 싶은 걸 지유가 기분 좋게 같이 해주는 날이야. 할 수 있지?"


지유는 잠시 고민하더니, 오빠의 긁힌 손등을 슬쩍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오빠가 대장 해!"


어떨결에 대장이 된 아들이 선택한 첫 번째 행선지는 숙소 근처의 대형 몰에 있는 레고 스토어와 게임 센터였다. 평소라면 '여행지까지 와서 무슨 게임이야' 혹은 '시간 정해놓고 해'라고 단호하게 말했을 테지만, 오늘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아들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아들은 신이 나서 평소 눈여겨봤던 테크닉 레고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빠, 이건 엔진 구동 방식이 다르고요, 저건..."


평소라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을 이야기들이었지만, 오늘은 아이의 눈을 맞추며 끝까지 경청했다. 아이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토록 원하던 '싸움 놀이' 대신 선택한 오락실의 에어하키 게임에서, 아들은 지유에게 이기는 법을 가르쳐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지유도 은근히 오빠가 하는대로 하는 게 재밌는 듯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들 역시 억지로 양보하는 오빠가 아니라, 즐거움을 공유하는 리더가 된 듯 두바이의 태양보다 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이집트 카이로는 두바이와는 전혀 다른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정교한 회로 기판 같던 두바이의 세련미 대신, 수천 년의 먼지가 섞인 묵직하고 역동적인 혼돈이 우리를 맞이했다. 약간의 텁텁함은 이곳이 그 오래된 이집트임을 실감나게 했다.


카이로 시내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숙소는 고풍스러운 목재 가구와 높은 천장이 인상적인, 조금은 투박하지만 정겨운 곳이었다. 원래는 호텔로 향할 계획이었지만 호텔로 향하는 길에 있는 이 숙소에 눈을 떼지 못하던 아들이 이곳에 가고 싶다는 말에 묶게된 숙소였다. 걱정했던것보다 위생적이고 깔끔해서 우리 모두 만족하고 있었다.


"자, 이제 잘 시간이야.

아들, 오늘 대장이니까 침대도 네가 먼저 골라."


두바이에서라면 당연히 '지유가 무서워하니까 안쪽 침대 줘'라고 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들은 잠시 숙소를 둘러보더니 창밖으로 카이로의 밤거리가 슬쩍 보이는 중간 사이즈의 침대를 가리켰다.


"나 여기서 잘래!

지유는 엄마랑 저기 넓은 데서 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아들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짠했다. 아들은 씻고 나오자마자 자신이 찜한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아빠, 나 오늘 진짜 좋았어.

내 말 다 들어줘서 고마워."


잠들기 직전, 아들이 웅얼거리며 내뱉은 그 한마디가 두바이에서 쌓였던 내 마음의 짐을 녹여내렸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이벤트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존중받고 있다는 확신이었다는 것을 이집트의 첫날밤에 다시금 깨달았다.


내일부턴 피라미드의 거대한 돌덩이들 사이를 누벼야 한다. 하지만 걱정 없다. 우리 집 대장이 기분이 아주 좋아졌으니까. 지유를 재우며 숨죽인 와이프의 입가에도 슬며시 웃음이 얹어지는 게 나까지 기분이 정말 좋았다. 우리는 서로 눈인사를 하며 내일을 기약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내일이 이번 여행의 최악의 사건에 연루될 줄은 ...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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