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려보기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니야?
얼마 전, 가족여행을 마치고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이륙을 하자마자 비행기가 꽤나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겁 많은 나는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기내식을 서빙하고 계신 승무원 분들을 살펴보니 다행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멈추지도 않고 계속 서빙을 하시는 걸 보면 심각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이때다 싶었다.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 들고 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서를 쓴 건 아니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 내가 후회하는 건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냥 마지막 순간을 그려보고 싶기도 했다. '유서 작성하며 죽음에 대해 고찰해보기' 진부할 수 있지만 꼭 한 번 진지하게 해 보고 싶던 일이었다.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그냥 침대에 누워 작성해 본 적이 있었다. 'A를 못해봐서 아쉽고 B를 했던 건 정말 좋았다' 같은 내용이었다. 유서라기보다는 그냥 일기에 가까웠다.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펜을 드니 상당히 몰입이 됐다. 쓰다 보니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다 쓰고 나니 다이어리 4페이지가 넘었다.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진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쓸 법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할 겨를도 없었다.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아쉬움이 있을 뿐이었다. 진짜 유서를 쓴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이라고 몰입하자
떠오르는 건 가족과 친구들 뿐이었다.
평온한 상태에서 작성했던 유서와는 많이 달랐다. 예전에는 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대부분이었다면,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작별인사뿐이었다. 지난번 유서 작성이 실패했던 이유는 죽음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인 듯했다. 비행기가 흔들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황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저절로 몰입이 되었다. 덕분에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좀 더 선명하게 그려 볼 수 있었다.
엄마, 아빠, 오빠와 아이, 동생, 시댁 식구들, 친구들. 함께 해줘서 고맙고, 더 많은 시간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적었다.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지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았다. 평소라면 오글거린다며 하지 못할 만들이었다. 그렇게 편지로 시작한 글은 편지로 끝났다. 그때의 마음을 실제로 전달하진 못했지만, 나에게만큼은 강렬하게 남았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소중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큰 비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별거 아니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고, 노력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건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유서라고 써 놓은 글을 두세 번 다시 읽다 보니 어느새 비행기 흔들림은 멈춰있었다. 그렇게 무사히 집에 돌아왔고 다시 일상이 되었다. 짐을 다 풀고 나서 비행기에서 끝까지 다 보지 못했던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마저 보았다. 췌장암에 걸린 여주인공 사쿠라와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와 마음을 나눈 남학생 하루키의 이야기였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공감됐지만 다음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어느 날 병실에 찾아온 하루키가 진실게임을 하며 사쿠라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너에게 있어 산다는 건 무슨 의미야?
진짜 그걸 묻는 거야? ㅎ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일... 아닐까? 누군가를 인정하고 좋아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고 누군가와 함께 있고 손을 잡고 서로 껴안고 스쳐 엇갈리고 그게 산다는 거 아닐까? 혼자 있으면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없어.. 좋아하면서도 밉고 즐거우면서 우울하고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과 남과의 관계들이 내가 살아있단 걸 증명해 주는 것 같아 그래서.. 이렇게 너와 있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야. 네가 선사해 주는 일상이 나한테는 보물이거든.
평소였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수도 있을 대화였지만 비행기에서 유서를 작성 해 본 직후였기 때문일까? 사쿠라의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울컥할 만큼 마음에 와 닿았다. 사쿠라의 대답은 하루키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관계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과 사소한 일상이 소중하다는 말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영화는 계속해서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들었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영화를 다 보고 무엇부터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창할 것 없는 그 순간이 소중히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기로 했다.
[다음편] 아기에게 배우는 아이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