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동화 중에 「완두콩 위에서 잔 공주」(빌헬름 페데르센 외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안데르센 동화집》, 시공주니어, 2016)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나라에 진짜 공주님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왕자가 살았다. 왕자는 많은 공주를 만났으나 진짜 공주를 찾아내지는 못하고 깊은 슬픔에 빠진 채 자기 나라로 돌아온다. 왕자가 찾는 ‘진짜 공주’란 어떤 공주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한 공주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왕자가 사는 성문을 두드리게 되고, 나이 많은 임금님이 문을 열어준다.
비에 쫄딱 젖은 처량한 모습이었죠! 머리카락과 옷에서 뚝뚝 떨어진 빗물이 구두 앞부리로 흘러들었다가 뒤꿈치로 흘러 나가는 형편이었지요. 그런데도 그 공주님은 나는 진짜 공주랍니다, 하고 말하지 뭐예요.
공주는 폭풍우 치는 밤, 비에 젖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뭔가 감정적으로 축축하게 젖은,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운 어떤 사연이 있었을 것만 같다. 나이 많은 임금님이 문을 열어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어려운 관문은 이제부터다.
“나는 진짜 공주랍니다”라고 스스로는 말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깐깐한 늙은 왕비는 ‘그거야 어차피 밝혀지겠지.’ 조용히 속으로 생각한다. 이윽고, 이 이야기의 핵심 모티프인 완두콩 장면이 등장한다.
늙은 왕비는 침대 위에 완두콩 한 알을 놓고, 그 위에 요를 스무 장 깔고, 다시 푹신한 깃털 요를 스무 장을 깐다. 빗속을 헤맸으니 곤히 잠들 만도 한데, 공주는 완두콩 한 알의 딱딱함을 감지하고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침내 “이렇게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진짜 공주님이 틀림없지요.”라며 진짜 공주로 인정을 받고, 시험을 통과하여 왕자와 결혼을 한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차기 왕비가 될 사람이니 당연한 것이 아니냐, 그 정도의 섬세함과 예민함 없이 어찌 한 나라를 이끌어가겠느냐라는 생각도 들지만, 진짜 공주란 마음이나 감정을 예민하게 잘 살피는 감각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든 가족은 하나하나의 단단한 성문과 같아서 그 성문 안으로 들어갈 때는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왕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왕자 너머에 있는 늙은 임금님과 깐깐하고 야무진 늙은 왕비, 그리고 그들이 이뤄낸 하나의 커다란 성. 그 성이 그냥 이루어졌겠는가? 얼마나 많은 근면함과 노고가 뒤따랐겠는가? 공주가 찾아간 성문 안의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성문을 두드리며 공주는 스스로 입성한다! 옷몸이 흠뻑 젖는 폭풍우 치는 밤에! 왕자만이 아닌 늙은 임금님과 늙은 왕비라는 또 다른 타자의 축축한 감정까지 살필 각오를 가지고. 세상에 이런 공주가 정말로 있을까? 나한테는 그저 동화 같고, 옛이야기 같지만 세상 일 또한 알 수 없다. 정말로 이런 공주가 있을지도. 그런 의미에서 이 공주는 왕자가 찾는 ‘진짜 공주’가 맞을지도.
일상 속에는 맑고 쾌청하고 기분 좋은 날만이 아닌 축축하고 비 오는 날도 많다. ‘진짜 공주’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밤중에 찾아온다. 여기에 포인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공주의 예민성이 날이면 날마다 발휘된다면 공주는 물론이고 주변사람까지 신경쇠약에 걸릴지도 모른다. 한 집안이 이처럼 폭풍 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타자의 축축한 감정을 알아채는 공주의 예민성이 발휘된다면 진짜 공주이겠지.
나 자신의 축축한 마음이나 감정도 제대로 알아채지도 못하고 살피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어찌 타자의 축축한 감정까지 살피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때때로 그 타자 너머에 또 다른 수많은 타자가 함께 존재하기까지 하는데. 공주가 스스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왕자는 평생 진짜 공주를 찾지 못했을지도...
‘진짜 공주’는 각오를 하고 축축한 상황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지만, 때때로 성큼성큼 들어와서는 자신은 하나도 젖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축축한 풀밭에만 들어가도 바지자락이 젖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련만, 질퍽질퍽한 흙발로 들어와 놓고는 행여나 자신의 옷자락이 젖을 세라 벌벌 떠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어찌 되었거나 안데르센의 「완두콩 위에서 잔 공주」를 읽으면서 ‘이때다’ 할 때가 아니면, 함부로 타자의 성문을 두드릴 일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