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와 하루 사이
어제 친구랑 함께 영화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를 보고 왔다. 감동했다.
며칠 전에 친구한테서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 감독과 배우가 함께 하는 특별 싱어롱 상영회"가 있어서 후원을 했다며, 토요일 시간 되느냐는 연락이 왔다. 물론 시간이 됐다.
1990년대 초가 무대 배경이었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분들과 학생운동을 하는 총학생회, 민중가요 노래서클 들꽃소리가 연대하여 조직폭력배보다도 더 무섭고,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불법, 부정, 부패, 악랄한 경영을 일삼는 공장주 운영진들과 맞서는 이야기였다. 연대하는 시민, 그래도 양심을 잃지 않은 진압대의 모습이 현 시국과 겹쳐 더욱더 와닿는 영화였다.
노래서클 들꽃소리 멤버들의 노래, 민중가, 공장 노동자분들이 부르는 노동가 등이 영화가 진행되는 사이사이에 등장한다. 노래는 영화 마지막에 다다라 성스럽고, 아름답고, 슬픔을 승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영화 말미에 흘러나오고, 영화가 끝난 뒤 배우분들이 단상에 나와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주먹을 불끈 쥐고 따라 불렀다. 젊은 시절 많이 들었던 노래였는데 이 노래를 한동안 잊고 있다가, 12.3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한 후 여의도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탄핵 집회에 참가하면서 다시 이 노래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12월 14일 탄핵이 가결되던 날, 여의도에선 엄청난 환호성과 깃발이 나부꼈었다. 나는 그때까지 학문으로만 탐구하던 "연대"의 힘을 생생한 울림과 온도를 통해 피부로 체득했다. 촛불집회 때와도 또 다른 그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에너지였고, 감동이었다.
영화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를 보면서 다시 그때의 감동에 휩싸였다. 현실에서 실체험하고,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다시 체험하는 감동은 그때의 생생한 감각을 다시 일깨우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작용을 했다. 못되고 나쁜 행동의 반복은 인지한 즉시 잘라내야 하지만, 여의도 집회와 영화에서 느꼈던 연대의식과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일깨움의 반복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다른 형태로 내 생애에서 반복되길 바란다.
영화에서 공장 경연진들은 가족주의로 운영되고 있었다. 기업주 책임자는 국회의원을 하고 있었고, 그 아들과 삼촌 박동일 사장이 실재 경영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삼촌 연기가 대단했다. 어찌나 비겁하고, 상대나 상황에 따라 어찌나 순식간에 태도를 전환하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비겁한데 포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말이지 무서웠다. 실제로 지금도 이런 사람이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노래는 사람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악이나 노래에는 사악한 기운도 물리치는 기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친구가 귀한 시간을 내서 후원하고 나를 불러준 것처럼, 나도 영화가 끝나고 즉시 영화표 두 장을 예매했다. 이런 행동은 빨리하는 것이 좋다. 영화표를 끊으면서 친구가 나에게 연락을 준 것처럼 나도 바로 친구에게 전화해 이날 같이 영화를 보자며, 시간 되느냐고 묻는다. 시간이 된다고 한다. 두 번째 관람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조금은 즐기면서 봐야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손을 움켜잡고, 눈물을 닦느라 좀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