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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애 Oct 24. 2022

지리산 산행기

가까운 산에 바람 쐬러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로 보성 초암산에 갔다가 산 정상의 맛을 알게 된 남편과 블랙야크 100대 명산 인증하러 전국의 많은 산을 다녔다. 가까운 산은 당일치기로 다녀오는데 먼 지역의 산은 주로 차박을 했다. 1박 2일, 2박 3일은 기본이고 9박 10일까지도 차에서 먹고 자고 산행을 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남편은 먼저 산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상세히 검색한다. 등산 지도를 살펴보고 들머리, 날머리와 소요시간까지 꼼꼼히 체크한다. 나는 어느 지역의 무슨 산에 가는지 듣고도 까먹은 채 되묻지 못하고 집을 나선다. 남편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할 때나 목적지 인근에 가서야 속으로 “아, 맞다.” 한다. 때론 갔다 온 산 이름이며 산마다의 특색이나 느낌이 가물가물하기도 한다.


지리산 밑동에서 올라온 바람

노고단 고개 돌아 시암재 쉼터에서

땀내 풍기며 절어온 세상 욕심을

뿌리 깊숙이 감추었다가

뱀마냥 허물 벗어 놓는다


산자락에서 익어온 독경소리 휘어져 감겨온다

등선들의 자애로운 몸짓 속에 흐르는

지리산의 온정이

바람이기에 바람다워야 하고

바람다워야 하기에 바람이어서는 안 되는

무거운 상처를 다독여 준다


세상은 산보다 높고 험하지만

잉태하지 못한 별이 있기에

바람은 부화의 꿈을 안고

세상 속으로 떠나며 영원히 머문다

김미향 시인의 ‘허물 벗은 바람’ 시 전문


지리산의 영봉으로 알려진 노고단은 예로부터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으며 정상에 돌로 쌓은 제단이 있다. 노고단을 오르는 사람 중에는 영봉의 기운을 얻기 위해 오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나는 노고단에 세 번 갔는데 갈 때마다 색다른 풍광을 보여주었다.

날씨가 흐린 날에 갔을 때는 운무에 휩싸여 조망은 볼 수 없었어도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신비감을 느꼈고, 반야봉에 가느라 노고단에 올랐을 때는 날씨가 화창하였다. 철쭉꽃이 만발하고, 탁 트인 조망과 파란 하늘, 산 아래로 펼쳐지는 구름바다가 정말 멋있었다.


<땀내 풍기며 절어온 세상 욕심을

뿌리 깊숙이 감추었다가

뱀마냥 허물 벗어 놓는다>

시인은 노고단에 올라갔다 내려와 시암재 휴게소에서 독경소리를 들으며 ‘지리산 밑동에서 올라온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던 것일까.


 “우와! 피자다.”

가족과 함께 나온 어떤 아이가 등산로를 만들어 놓은 돌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에는 돌길이 조각 피자처럼 보였나 보다. 내 눈에는 대충 뚝뚝 떼어놓은 쑥떡 같이 보였다.


성삼재주차장-노고단-반야봉-삼도봉에 갔다 원점 회귀했을 때는 7시간 38분 걸렸다. 주차요금이 13,000원이다. 산에 오르다 버섯이며 꽃에 한눈파느라 해찰 부리지 않고 조금만 더 서둘렀어도 1,000원은 덜 냈을 텐데 아깝다.

 

바래봉에 오를 때는 어디선가 나타난 백구 한 마리가 정상에 올라갈 때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길잡이 노릇을 했다. 목줄을 하고 털이 말쑥한 걸로 보아 유기견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백구가 몇 걸음 앞서가다가 우리가 뒤처지면 멈춰 뒤돌아서서 혀를 내밀고 숨을 몰아쉬며 끈기 있게 기다려주기까지 했다.

정상석 인증하고 데크에 앉아 백구와 같이 사진 찍고, 산을 내려올 때도 주차장까지 함께 내려왔다. 우리가 차를 타고 출발하자 한참을 뒤따라오다 마을 입구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 백구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그새 정들었을까. 마음 같아선 되돌아가 백구를 데리고 오고 싶었다. 지금도 바래봉을 떠올리면 차 꽁무니를 바라보고 서 있던 백구, 우리 옆에 붙임성 좋게 앉아 있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천왕봉은 빡세고 깔끄막도 심하다. 배낭에 방울토마토와 간단하게 먹을 점심 그리고 생수 500m 4병을 챙기고 아침 6시 반에 집을 나섰다. 8시 30분에 중산리에 도착하여 버스로 10여 분 정도 간 후 법계사 쪽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낙엽 쌓인 흙길은 비단길이다. 울퉁불퉁한 바윗길, 돌계단의 연속이다.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자욱하여 비옷이라도 챙겼어야 했을까. 산을 오르는 내내 길은 촉촉하고 나무에 물기를 머금고 있다가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대자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땀과 물기에 젖어 옷이 축축하였지만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혀 주고 햇볕이 나지 않아 등산하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조망이 좋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골짜기가 짙은 안개로 뒤덮인 채로도 신비롭고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몽환적인 느낌이다.


지리산은 습도가 높고 흐린 날들이 많아서인지 나무에 온통 이끼가 뒤덮여 두툼한 옷을 입은 듯했다. 그 이끼 위에 자잘한 버섯들이 꽃처럼 퍼져 기생하는 것을 보면서 참나무에 표고버섯 종균을 심어 재배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산에 오르다 보면 다른 산에서 봤던 꽃들도 있지만 그 산의 특색 있는 나무와 꽃들이 있다. 새순이 돋아났을 때 원추리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 확신이 없었는데 노란 꽃이 참 예쁘게 피었다. 사진을 찍어 네이버 검색을 해본다. 내 핸드폰은 감질맛 나게 기다리게 해놓고 데이터가 약하다고 딴청을 하며 번번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조금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앞서가는 남편의 뒤를 바삐 따라가느라 해찰 부릴 짬이 없어 아쉽다.


반야봉에 오를 때 봤던 버섯들은 생기다 말았는데 천왕봉에 오르는 길의 버섯은 넓적하면서 굵직하다. 치마폭처럼 특이하게 생긴 버섯을 보자 결국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건다.

‘얘, 넌 누구니?’


산에 다니다 낯이 익어 이제 이름을 튼 꽃들이 보인다. 섬말라리 너도 반갑고 엉겅퀴, 범꼬리, 원추리꽃 너도 반갑다. 활짝 피어 무척 소담스러운데 아직 제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는 꽃에는 미안하다. 산길에 나와 앞발을 들고 서 있던 앙증맞은 다람쥐가 미처 사진 찍을 새도 없이 숲속으로 통통 뛰다시피 사라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바위가 돌출된 능선을 올랐을 때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한 줄기 바람이 막힌 숨통을 뚫어준다. 나무에 기대선 채 1분 정도 쉬었을까. 오래 쉬면 더 힘들다고 길을 재촉하는 남편 뒤를 따른다. 산새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거나 ‘산자락에서 익어온 독경소리 휘어져 감겨’오는 걸 느낄 겨를이 없다. 바람이 부려놓은 ‘땀내 풍기며 절어온 세상 욕심’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산에 오른다.


‘등선들의 자애로운 몸짓 속에 흐르는 지리산의 온정’을 느끼는 시인의 경지에 발뒤꿈치라도 따라가려면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까. 한 고개 넘고 또 한 고개 넘었는데도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나이가 세 살만 넘으면 만만한 놈이 없고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몬당한 산이 없다'는 남편의 말을 실감한다.

여전히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가면 돼. 다 와 가.”하는 남편의 말에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천왕봉에 다다를 즈음 산기슭에서 운무가 빠른 속도로 자욱하게 밀려왔다. 3대가 덕을 쌓아야 조망을 볼 수 있다는데 다섯 번을 올라도 못 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운무 때문에 조망이 안 터질까 걱정했는데 천왕봉에 올랐을 때 어느 순간 운무가 서서히 걷히고 산 아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둥실 떠 있고 잠자리 떼가 한가롭게 날아다닌다.

해발 1,700미터가 넘었는데 산꼭대기에 쉬파리 떼가 벌처럼 꽃에 앉아 꿀을 빨아 먹는 광경이 특이하다.


기암괴석들도 정말 멋있다. 조망을 못 보게 되면 내 탓일 뻔했는데 조망을 보게 되었으니 내 덕이라 우겨본다.

저 멀리 파도처럼 너울대듯 겹쳐 있는 산들과 산허리에 걸쳐 있는 구름을 바라보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수평선도 보이지 않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지기도 한다. 정말 장관이다. 산에 오를 땐 매번 힘들어도 정상에 서서 내려다보면 “그래, 이 맛이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정대구 시인의 시 ‘구름과 놀다’처럼 하늘을 보고 벌렁 드러누워 몽실몽실한 구름의 귀를 잡고 코도 만져보고 발바닥을 간질여보며 놀고 싶지만 정상석 인증 사진 몇 장 찍고 “어이, 가세!”하며 스틱도 짚지 않고 성큼성큼 내려가는 남편의 뒤를 따라 내려오기 바쁘다.


<세상은 산보다 높고 험하지만

잉태하지 못한 별이 있기에

바람은 부화의 꿈을 안고

세상 속으로 떠나며 영원히 머문다>


다시 ‘허물 벗은 바람’ 시를 필사하며 마지막 부분을 되뇌어본다. 지리산 노고단, 바래봉, 반야봉, 천왕봉을 올라갔다 왔어도 모르겠다.

산을 얼마나 오르고 또 올라가야 ‘바람은 부화의 꿈을 안고 세상 속으로 떠나며 영원히 머문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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