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미애 Oct 26. 2022

아산에 가다

주부 외출

나이 든 아줌마들끼리 며칠 분량의 곰국을 찜통 가득 끓여놓고 ‘묻지마 관광’을 떠날 때 “어디 가냐?”라거나, “언제 오냐?”라며 묻는 남편이 ‘간 큰 남자’라는 우스갯말을 듣기는 했지만, 내겐 가까이에 살면서 함께 수다를 떨 친구도 없고, 이렇다 할 모임도 없다 보니 핑계 삼아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로 무얼 한다거나, 어딜 가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한 적도 별로 없었다. 

지난 5월, 시산문 작가회 모임을 대전에서 갖기로 한다는 공지가 떴었을 때도 ‘도무지 여가가 나지 않아서’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글다운 글 한 줄 못 쓰고 있어,‘내가 누구입네.’하고 작가회 모임에 얼굴을 디밀기도 영 낯간지러운 일이라 많이 망설였는데 작가회가 결성된 후 첫 모임이라 꼭 참석하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차츰 기울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하루 휴가를 달라고 했다.


모임이 수도권에서 열리는 것이라면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아예 엄두가 나질 않았겠지만, 중간 지점인 대전쯤이라면 모임 전이나 모임 후에 당진에 사는 친구와도 연락을 취해서 아주 잠깐이나마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도 있었기 때문이다.

점방을 비울 수 없는 여건상 허락을 받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많이 주저하다 얘길 꺼냈는데 남편이 흔쾌하게 점방은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여전히 무늬만 작가일지라도 내가 소속한 세계를 인정해주고, 점방 내에서만 살다시피 하는 것에 내심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던 듯, 콧바람 좀 쐬고 오라는 배려였다.

남편의 허락을 받고 나서 다시없을 휴가를 받은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모임을 기다렸다. 그리고 당진에서 호수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자 교사인 친구와도 대전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 친구와의 우정은 각별하다.

유년 시절, 바로 이웃에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소한 일로 시샘하며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 맞대고 놀곤 했던 유일한 소꿉친구다.

그 친구가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을 간 후 몇 차례 편지 왕래를 하다 소식이 끊겼었는데, 몇 해 전에야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 그리곤 종종 전화로만 “니, 잘사냐? 아야, 우리 언제 얼굴 한번 보자. 맨날 말로만 언제 보끄나? 하지만 말고 진짜 한번 보자. 언제 내려올래?”라는 통화를 하곤 했었다.

거리가 너무 멀고 서로 바쁘다 보니 ‘한번 보자.’라는 것도 항상 마음뿐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겠지, 친구와 만나면 어디에 다녀오는 게 좋을까, 하는 설렘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참석 인원이 적어 대전에서의 모임이 취소되고, 차후로 수도권에서 개최된다는 공지가 떴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다음으로 연기되었다고 번복하기도 어려웠다. 그때 가서 다시 모임에 가겠다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게 되레 새삼스러운 일이 되어버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모임에 꼭 참석하려고 했던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 할애된 하루를 그대로 강행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반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만이 남았다. 모임이 취소되었다고 해서 그냥 주저앉기엔 모처럼의 하루가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는 모임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말을 못한 채로 여전히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약속된 날이 다가올수록 내게 허락된 휴가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꼭 가야 할 애초의 목적도 아니면서 남편에게 종일 혼자 점방을 보게 하면서까지 올라가려고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대전에 가기로 한 날을 이틀 남겨두고까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한 끝에 결국 친구에게 못 가겠다는 전화를 했다.

“니를 꼭 만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음을 기약하자.”

그 친구 역시 내가 올라간다는 말에 바쁜 일정을 다 미루고 주말 시간을 비워두었을 텐데 괜스레 만나자는 바람만 넣고 이랬다저랬다 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막상 먼 길을 갔다 오려고 하니 내 몫까지 고생할 남편이 걸려 마음이 무거워진 것이다.

“그래? 못 온다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아무 때고 올라오고 싶을 때 올라 와.”라고 하였다.

그런데 뒤이어 하는 말이 부드러운 억양이었는데도 정곡을 찌르듯 아픈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넌 앞으로도 평생 그렇게 남편과 아이들 걱정만 하며 숨죽이고 살면서 혼자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거야.”라던 말이…….


이제까지 살아온 세월을 더듬어 보건대 그건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지만, 나를 꿰뚫어보는 듯한 그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윙윙 울리는 듯했다.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우물 안에 가둔 내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거란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던 휴가에 대한 미련을 그렇게 포기하고 나니 ‘가? 말어?’에 대한 고민이 해결된 셈이다.

“그냥 안 가기로 했어. 대전 모임에 가는 김에 소꿉친구도 만나고 오려고 했던 것인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밤늦게 내려오게 될 테고, 자기 혼자 종일 점방을 보게 하고 갔다 오려고 하니 마음에 걸려서 그냥 가지 않으려고 그래.”라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남편이 애들더러 교대로 점방에 나와서 심부름을 하라고 하면 된다며 걱정하지 말고 그냥 다녀오라고 했다. 

분에 넘치는 남편의 배려가 너무 고맙고,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나만의 하루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건 그냥 하루가 아니라 ‘그렇게 자신을 억누르고 살다간 평생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던, 단정에 가까운 친구의 말이 크게 작용한 것이기도 하다.


남편으로부터 재차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는 말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친구와 다시 통화를 해서 만날 장소를 정했다.

이제 굳이 대전이 아니어도 되므로 당진에서 가까운 ‘천안아산’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애초에 친구와 대전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도 작년에 시산 모임에서 갔었다고 한, 아산 유곡리의 봉곡사 들어가는 입구에 사시는 ‘법사’ 오세권 님의 저택에 찾아가 보려던 참이었다.

                                                                <법사님의 저택>


산골짜기에 하얀 집을 짓고 봉곡사로 향하는 솔숲길을 오르내리시거나 정원 가득 들여놓은 야생화를 바라보며, 혹은 느티나무 아래 앉아 새소리와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사색에 잠기기도 하면서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섭리를 몸소 체험하여 집필하셨을, 『그리움이 맴도는 계절에』라는 법사님의 수필집 교정을 보면서 알게 된 인연이다.

법사님께서 <언제 시간이 되면 가족과 함께 놀러 오라.> 하시며 내 블로그의 안부게시판에다 인사차 놓고 가신, 저택을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만 접했을 뿐이었지만, 울창한 신록으로 둘러싸인 저택을 찍은 그 사진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이다음에 꼭 한번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10일에 담양에서 열렸던 ‘시와창작’의 문학기행지에서 법사님을 뵈었을 때, 각종 야생화와 나무들을 심어 손수 만드신 정원에 대해 그리고 저택 바로 옆의, 봉곡사에 올라가는 숲길이 ‘산림청’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이 선정한 <아름다운 천 년의 숲길>로 유명하다는 말씀을 듣다 보니 더욱 궁금하였다.


광주역에서 아침 7시 20분발 KTX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을 내다보니 들녘의 네모반듯하게 농지 정리가 잘된 논배미엔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보리가 봄바람에 물결을 치듯 출렁거리고 있었다.

겨우내 빈 논으로 묵혀두었던 일부 논에는 자줏빛 자운영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광경도 보이고, 이미 모내기가 끝난 논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허구한 날 점방에만 있다 보니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아카시아 꽃의 향기도 못 느껴보고, 눈꽃 흩날리는 벚꽃 구경이라든가, 진달래와 철쭉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장관도 어슴푸레한 기억만 남아 있었다.

계절이 가고 오는지의 변화를 점방에 찾아온 손님들의 옷차림에서나 겨우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이렇게 훌쩍 나서면 되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에서 아산까지 약 2시간 10여 분이 소요되었다.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 바퀴가 데그럭거리며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뒤로 물러나는 바깥 풍경을 내다보면서 곧 만나게 될 친구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느라 그리 지루한 줄을 몰랐다.

‘천안아산’역에 도착하니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소꿉친구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겨 주었다.

연예인처럼 한껏 멋을 부린 친구는 마흔 중반에 접어드는 나이임에도 군살이 전혀 없고, 탱글탱글한 얼굴이 서른 초반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와 대조로 난 마땅한 외출복이 없어 급하게 사 입은 라운드 티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똥배를 미처 커버하지 못한, 전형적인 시골 아줌마의 두루뭉술한 스타일이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엔 서로 사는 형편이 고만고만했었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선 사회적 위치나 생활수준이 확연히 다름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허물없는 친구 사이라도 때론 나를 위축되게 한다. 하지만 그 친구가 그만큼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낸 결과라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친구의 차로 외암리 민속마을에 도착해서야 법사님께 전화를 드려서 지금 찾아뵙겠노라며 법사님 댁의 위치를 여쭈었다. 미리 말씀을 드리게 되면 그 또한 손님맞이에 부담이 더해질 것이라 여긴 때문이다.

전화로 일러주신 대로 봉곡사 올라가는 입구의 주차장에 이르니 개량 한복을 입으신 수수한 차림의 법사님께서 인자하신 사모님과 함께 마을 어귀에 마중 나와 계셨다.

지난번 시와창작 문학기행지에서 법사님을 뵈었기에 초면은 아닌 셈이지만 그래도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들이닥쳐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는데 반갑게 맞이해주신 두 분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나는 제일 먼저 수필집에서 언급된 무쇠 솥이 궁금했다.

법사님께서 어머니의 평생 손길과 오랜 정이 배어있는 무쇠 솥을 대문 대신 놔두고, 그 솥에 계절에 따라 화초를 심어 어머니의 향기를 느끼고 싶다는 대목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두 개의 무쇠 솥은 야트막한 대문 옆에 놓여 있었으며, 솥에는 돌나물과 채송화가 심어져 있었다.

수필집이 발간되었을 때만 해도 대문이 없었는데 집을 비워두고 출타를 할 때 애로사항이 많아 최근에 달아 놓으셨다고 한다.

                                                               <야생화 화단과 항아리 연못>


대문 안쪽으로 들어가니 집으로 이어지는 계단 입구에 심어 놓은 산수유나무를 비롯하여 살구나무, 자두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들과 푸른 잔디밭 그리고 각종 야생화를 심어 놓은 화단이 있었으며, 땅에 묻어 놓은 장독과 큰 고무통마다 심어 놓은 연잎들 사이로 송사리만 한 올챙이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대문 앞에 놓아둔 무쇠 솥과 더불어 오랜 세월을 어머니와 함께 했을 장독들, 그리고 빗물을 받아놓거나 간이 목욕통으로 썼을 법한 고무통을 허투루 버리지 않고 미니 연못을 만들어놓으신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릴 적 향수를 느끼게 하는 수동식 펌프>


또한, 땅속에다 파이프를 묻고 높은 골짜기의 물을 끌어다 연결해 놓으셨다고 하는 수동식 펌프가 정원 곳곳에 놓여 있는 장독과 조화를 이루며 한껏 운치를 더했다.

집 옆으로는 개나리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듯 축대에 걸쳐져 있는 개울이 있었다.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가재를 잡거나,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풀벌레 울음소리를 벗 삼아 자연을 만끽하고, 밤에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러움이 인다.


법사님의 서재인 다락에도 올라가 보고, 사모님께서 손수 말려 놓았다가 끓여주신 국화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후 곧 일어섰다.

마음 같아선 내친걸음으로 주변 곳곳을 세심히 둘러보며 좀 더 많은 영상을 담아오고 싶었고, 시산 모임 때 ‘늑대’ 이성직 님이 봉곡사 종에다 머리를 대고 개구쟁이 같은 포즈를 취한 사진을 본 기억이 나서 적송이 온몸을 뒤틀며 서 있는 듯한 천 년의 솔숲길을 걸어 그 봉곡사에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곧바로 안산에 사시는 친구네 친정엄마와 언니를 뵙고 오려면 일정이 빠듯했다.


     갈 길이 바쁜 터라 연신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솔숲길을 먼발치에서 잠깐 바라만 보며 심호흡을 하여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으로만 대신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엔 사전답사 차원이라 여기고 다음에 다시 와서 차분히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길로 안산에 가서 친구의 친정엄마를 비롯한 언니, 오빠를 뵈었는데 나로서는 근 20년 만에 뵙는 것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또한 예정에는 없었지만 시흥에 사는 내 막냇동생 집에도 갔다. 시간이 빠듯하여 오래 머물 수는 없었어도 마침 막냇동생 집에 올라가 계신 친정엄마도 보고 올 수 있었기에 아주 만족스런 하루였다.

친구가 차를 운전한 지는 꽤 오래 되었어도 고속도로로 나서는 건 처음이라 다소 긴장된다고 하였지만, 나는 조수석에 앉아 가면서도 전혀 불안한 감은 못 느꼈다. 그만큼 친구의 운전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아산-안산-시흥-다시 안산으로 동분서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친구가 졸음운전 하지 않게 내 대신 쉴 새 없이 떠들어주고, 안내해준 내비게이션의 공이 매우 컸다.

‘300m 앞에서 우회전입니다.’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듣고도 갈림길이 나오면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 길을 지나쳐버리곤 해서 유턴을 하기도 했고 설정을 재정비한 내비게이션도 다시 검색을 하여 안내하겠다는 멘트가 반복되었다.

내비게이션이 인공지능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성질 급한 사람이 안내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더는 못 가르쳐주겠다며 뛰쳐나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없는 동안 종일 혼자 가게를 보고 있었을 남편에게는 미안해서 전화도 못 했지만, 모처럼의 휴가를 만족스럽게 보냈기에 그동안 알게 모르게 누적되었을 스트레스가 완전히 정화된 것처럼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 또다시 아침 6시 알람 소리에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번갈아가며 뜨는 것으로 나의 하루가 시작되어 밤 2시 무렵 취침까지 반복된 일상으로 복귀를 하였지만, 때때로 심신이 고달프다 여겨질 때 지금의 이 느낌을 떠올리다 보면 좀 더 힘을 낼 수 있으리라.


이전 18화 조향순 시집 『풀리는 강가에서』와 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