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새벽녘
<앙: 단팥인생 이야기>라는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원래도 맑고 청량한 일본 감성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삶이 퍽퍽해지고 당장의 생계가 더 와닿으면서 어느 순간 픽션의 세계로 부터 멀어져 갔다.
그런데 그날 <앙>은 조금 다르게 다가와 새벽녘 고요한 심장을 묵직하게 두드리곤 홀연히 날아갔다.
삶의 어두움, 고됨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그 안에서 '맑음'과 '포용'을 말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나병을 앓은 기억을 손의 흔적으로 남겨 살아가는 할머니.
몸에 흔적을 남기진 않았지만
슬픔이 베인 남자 주인공-영화의 주된 배경인 도리야키 가게 점장-의 눈.
그 눈을 알아본 할머니의 손길.
오래 공들인 정성스러움으로 끓인 팥소를
마을 사람들과 나누려 나즈막히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인 할머니의 손.
그러나 그 손은 소문으로 퍼져나가고
잠시나마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던 할머니의 소망은
그들의 말소리에 무참히 흩어져버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다 요즈음 나에게 시선을 떨구게 되었다.
지난 2019년 1월 4일
무슨 계기였는지 모르겠다. 연초가 되고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우울한 감정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글 그림 작업은 사회에서의 역할, 그런 힘듦, 쭈그러진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진정한 나일 수 있었던 '여행과 일상의 순간'을 그려왔었다.
하지만 그 날의 겨울 밤.
작년 한해를 되돌아 보니
내 생활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과 기억에 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런 점이 마음에 안들었고
부정하고 외면하고 싶었다.
그림을 그릴 때, 혼자 책을 볼때, 여유롭게 주말을 보낼 때... ... .
그런 순간만이 '나'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무뎌진걸까?
어쩌면
나병 환자 시설에서 남은 나날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세상 밖으로 나와 소통하려했던,
팥알하나에 담긴 인생도 귀기울여 듣고자했던 할머니의 겸손하고 고즈넉한 모습에
play버튼이 다시 재생된 걸까?
사회 속에서 여전히 어리숙하고 쭈그려질 때도, 자존감이 희미해질 때도 있다.
언젠가 부터 그런 불완전한 모습도 '나의 일부'라는 걸
내 모습들 중 하나라는 걸 받아들여가고 있는 것 같다.
영화 마지막
환자 시설로 돌아가 남은 나날을 보내던 할머니는
도리야키 가게 점장과 소녀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그 글 속에는
긴 세월 소외, 슬픔으로 부터 승화한 할머니의 봄꽃 같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맑고 투명하고 따스한... ... .
'아마도 지금은 긴 긴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으로 가는 길이겠지... ... .'
하고 되내어 보고 싶다.
illust by tobysoo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