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짓꿏은 남자 아이들은 개미를 가지고 놀곤 했다.
그러다 그들의 호기심이 인간의 선한 본능을 넘어서는 순간,
개미들은 사지가 찢기거나 고문에 가까운 괴롭힘에 시달린다.
나는 8살 즈음이었으나 그것이 몹시 잔인하다고 느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혹여나 길을 걷다가 개미를 밟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땅을 보며 걸었다.
다행히 내가 죽인 개미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개미들은 죽어갔다.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들에 의해, 무심코 걷는 인간의 발자국 위에, 쉴새 없이 이어지는 공사장에서.
나는 결코 개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움직인들 인간이라는 거대한 변수 앞에서 개미의 목숨은 하찮았다.
돈을 많이 번 개미든,
예쁘고 멋진 개미든,
좋은 일만한 착한 개미든,
인간이 그들을 가려 죽이기엔 너무나 하찮다.
개미는 인간에게 신경써서 걸어다닐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
'어쩌면 우주 밖, 저 먼 곳에서 보는 인간도 개미와 별반 다를게 없지 않나.'
죽을 힘을 다해 움직이지만, 거기서 거기다.
거대한 자연 재해와 우주적 변화 앞에 인간은 하찮다.
아무리 애써도 개미가 인간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개미와 인간의 다른 점이라고는
덩치가 좀 크다는 것과,
인간은 한없이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 정도.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다만 인생이라는 거대한 과정에서 내가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을 뿐이다.
첫째, 나는 언젠가 죽는다
둘째, 나는 수많은 인간 개체 중 하나로 세상에 떨어졌다
셋째, 나는 삶의 변수 앞에 무력하다
이 세가지 원칙은 진실이다.
나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움직이고 있고
수많은 변수 앞에 삶은 이따금씩 이리 저리 휘청이다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개미와 다를 것이 뭐가 있는가.
뭐 이딴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결론이냐고 할테지만,
사실이 그러한 걸 어쩌겠는가.
다시 한번 팩트체크를 해 드리자면,
나도, 당신도, 우리는 하찮다.
삶의 고뇌는 하찮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함에서 온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내가 할 수 있다는 의지,
세상과 타인이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자만함,
쓸모를 다해야 한다는 각성.
유일하게 존재를 증명하면서 살아가는 개체는 인간 뿐이다.
그러다 변수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함을 깨달은 당신은 우울과 상실감에 시달릴 것이다.
현타를 맞고 나서도 여전히 과거 속에 사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내가 한 때 말이야..."
"내가 왕년에는..."
한 때 얼마나 잘 나갔는지라도 떠벌려야 존재가 증명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아중독'이다.
자아중독된 인간에게 '나'는 세상에 의미 있어야 하고 무엇이든 해서 이루어야 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 무엇을 해도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만족스러운 나를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보다 잘난 인간 개체는 차고 넘치고 그들의 빛남은 곧 나의 어둠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개미보다 이기적일 수 있는 이유는,
영원히 살 것이라 착각하는 자아 때문이다.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하찮은 나를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자아를 가만히 고요히 바라보고 있으면,
연민을 느낀다.
겸허해진다.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해진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지금 해줄 수 있는 것을 한다.
삶의 모든 것이 '지금 존재함'에 있음을 느낀다.
하찮은 존재가 하찮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