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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리 Jan 06. 2023

고민

여덟 살 아이의 겨울(2022.12-2023.02)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생일잔치에 초대 받았다.


며칠 차이를 두고 태어난 두 친구의 합동 생일잔치다. 반은 다르지만 단지 놀이터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이었다. 솔직히 아이들 보다는, 엄마들의 친목이 더 강하게 작용한 모임이었다. 나는 엄마들을 만나는 게 불편하지 않지만, 혹여 아이가 엄마들을 불편하게 만들까 주저하고 있다. 총 여섯 명, 생일을 맞이하는 두 집에 시간차를 두고 방문한다고 한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외부가 아닌 실내 공간은 내가 피하고 싶은 1순위다. 지금까지 경험하며 처절히 깨달았다.


밖에서는 잘 놀다가도 집에만 오면 꼭 일이 생기곤 했다. 태권도를 마친 뒤 놀이터에서 어울리던 친구에게 날이 추우니 집으로 오라고 했다. 이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우리 집에서 놀다 갔다. 자주 만나 노는 친구긴 하지만 이상하게 집에만 오면 핀트가 어긋났다. 둘이 잘 놀지 못하니 결국 내가 놀이를 이끌기도 하고, 일부러 술래가 되어 주기도 했다. 몇 분은 간식 타임으로 숨을 돌린다.


며칠 전에는 친구가 풍선을 달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내 아이는 풍선 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풍선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조금 부풀렸음에도 아이가 귀를 막는다. 풍선에 거부감이 있다 사라졌는데 요즘 새롭게 나타났다. 친구는 풍선에 바람을 넣고 손을 놓으면 풍선이 휙 하고 날아가는 놀이를 하고 싶었지만 아이는 친구가 풍선을 불 때마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얼굴을 찌푸린다.


이건 아주 작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내 거니까 만지지 마.“라는 말이 지속적으로 터져 나온다. 여긴 우리 집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식이다. 친구들 여섯이 모이면 아이가 얼마나 두드러질지 가늠이 안된다. 또 내가 얼마나 아이를 닥달할 지 알 수 없다.


생일 파티 하루 전, 잠이 오지 않아 가끔 방문하던 아스퍼거 모임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아스퍼거 성인이 쓴 글이 가슴을 후벼 판다. ‘단체생활 같은 유해한 환경은 결코 추천하지 않습니다.’ 확고한 이 문장에 나는 또 긴 밤을 헤맨다. 이 말은 내게 ‘친구들이 많이 모이는 생일잔치 같은 이벤트도 추천하지 않습니다.’로 다가온다.


아이의 의사를 묻지 않고, 적당한 핑계를 대어 생일 파티에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망설이고 있다. 내가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이번엔 좀 다를 거라는?

 

“너는 친구들 생일 파티에 가고 싶니?”
“응.“
”그런데 엄마는 걱정이 많아. 네가 친구랑 싸울까 봐.”
“그럼 그냥 할머니집 가서 TV 볼래. “


예상치 못한 쿨내 나는 전개에 나는 또 목이 멘다. “그래도 생일 파티 갈 거야.”라는 말을 기대했었나? 홀로 즐기는 TV가 더 좋을 수도 있지만, 막상 아이가 가지 않겠다고 하니 내 속마음이 드러났다. 아이를 생일 파티에 데리고 가고 싶었나 보다.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생일 파티에 갔을까, 안 갔을까? 결국 가긴 했다.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이 있어서 못 간다고 얘기 한 뒤, 선물만 전해 주고 가겠다고 전했다. 아이와 함께 친구네 들렀는데 마침 TV가 켜져 있었다. 아이는 그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겨울 왕국만 1시간 이상 보았다. 친구들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든다고 짜증도 내고, 중간에 TV 볼륨을 높여서 내게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너는 여기에 TV를 보러 온 게 아니야.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온 거야. TV를 보려면 할머니 집에 가서 보자. 오늘 할머니 집에 가서 겨울왕국 틀어줄게. "


아이는 텔레비전을 끄지 말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나는 아이에게 볼륨을 높이거나 다른 친구들이 시끄럽게 얘기한다고 소리 지르면 바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경고했다. 그 이후 상황은 놀랍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별일 없이 지나갔다. 저녁 시간이 되자 아이는 텔레비전을 끄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피자와 치킨을 먹었다.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르고 케이크도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그렇게 서너 시간 아이는, 두 친구의 집을 오가며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런 행운 같은 일이 다음에도 이어질지 나는 알지 못한다. TV에 정신이 팔려 다른 친구들이 오는 것도 모르고 홀로 앉아 있는 아이를 보며, 실내 모임 따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래도 커다란 이슈없이 서너 시간을 버텨낸 아이를 보며 실낙 같은 희망을 찾는다.



아이가 도전할 수 있는
사회적 경험의 적절선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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