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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리 Jan 27. 2023

1등

여덟 살 아이의 겨울(2022.12-2023.02)




I'm a loser.




조호바루에서 영어 튜터와 수업 중 아이가 내뱉은 말이다.


사촌형과 과일이나 동물, 물건 이름을 맞추는 게임을 했는데 자신이 형보다 못 맞추자 아이가 거듭 강조했다.


“나는 이겨야 해 I have to win."
“언제나 이길 수는 없어. We can't win all the time."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인도계 튜터가 대답했다. 이후에도 아이는 문제를 맞히지 못할 때마다 우는 소리를 냈다. 사촌형을 이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다. 자신이 이겨야 한다고 호소할 때마다 선생님은 교과서에 가까운 대응을 한다. 몇 번이고 내가 했던 말들. 늘 메아리처험 흩어졌던 말들.


“이기는 게임이 아니야, 즐기는 게임이야. This is not a winning game, this is a fun game.”
“아니, 이기는 게임이야. 나는 이겨야 해. No, this is a winning game. I have to win.”


수업 후 선생님에게 아이가 대단히 경쟁적이라고, 고치고 싶은 데 잘 안 된다고, 그게 아이의 성격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성격은 고치기 힘들어요.”라고 대답했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프로페셔널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팩트이긴 하지만 내 마음을 차갑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아이가 점차 나아지길 바란다는 내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상했다.


고작 4주, 단기 튜터에 대해 무엇을 바랐던 걸까? 차차 나아질 거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애들이 다 그렇죠,라는 말을 기대했던 걸까? 그녀에게 나는 그저 한국에서 온 외국인에 지나지 않을 텐데, 나는 왜 먼 타인에게 그런 위로를 바라는 걸까?   


며칠 전에는 레고랜드에 갔다. 놀이기구와 슈팅게임이 결합된, 카트를 타고 이동하다 과녁을 맞히면 점수가 올라가는 어트랙션이었다. 카트 앞엔 스코어 판이 있어 자신이 얻은 점수가 나오는데 아이가 어트랙션을 타는 중 오열하기 시작했다. 컴컴한 동굴 속, 총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유는 단순하다. 형이 자신보다 점수가 높았기 때문이다. 어트랙션에서 내린 후에도 아이는 서너 살이 할 법한 몸짓으로 방방 뛰며 울기 시작했다. 이런 강한 표현은 실로 오랜만이라 나도 난감했다.


"항상 이길 수는 없어. 1등 하고 싶으면 너 혼자 해. 그럼 언제나 1등 할 수 있잖아. “
"싫어."
"지더라도 이렇게 울면 안 되지."
"나는 1등을 해야 돼."
"그럼 엄마랑 같이 타. 엄마가 져줄게."
"그건 안돼. 진짜로 열심히 해서 내가 이겨야 해."
"그건 힘들어. 나는 어른이고 너는 어린이야."
"싫어. 나 1등 할 거야. 1등이 좋은 거잖아. 왜 형만 1등을 하는 거야!"  


끝나지 않는 지루한 대화가 이어졌다. 조호바루에 온 이후로 자기보다 잘하는 게 많은 형을 보며 그동안 쌓였던 게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이를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아마 아이를 데리고 곧바로 집에 갔을 것이다. “이렇게 점수가 나는 놀이기구는 타지 말자. 항상 1등을 할 수는 없어. 아니면 너 혼자 타던가. 그럼 맨날 1등 할 수 있어. 둘 중에 네가 선택해. 둘 다 싫다면 지금 바로 집에 가.”라고 말이다.


아이가 거세게 울며 날뛰어도,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외국 특유의 분위기가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초조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네가 어떻게 하나 보자, 는 마음도 있었다. 그 사이 새언니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점심을 먹으러 갔고 아이가 좋아하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시켰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병원의 의사는 아이가 매번 이기고자 하는 것도 자폐 성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 1등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강박. 의사 선생님은 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속적으로 가르쳐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러 져줄 필요도 없고, 계속해서 자신이 지는 상황을 맞닥뜨려야 한다고 말이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항상 1등이 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쯤이면 1등을 못하더라도 울거나 화내지 않을 수 있을까?




 인생이란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잘 져라.
씩씩하고 당당하고 후회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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