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까지는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3학년 때 친구와 1년 같이 자취를 했다. 연탄보일러에 단칸방 고등학생 자취생활이 얼마나 버라이어티 했을까. 하지만 그 모든 에피소드들은 고3이라는 무게에 모두 사라졌다.
같이 자취했던 친구 사무실이 작업실과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는데 연말모임을 친구 사무실 근처에서 하면서 보니 무려 걸어서 20분 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지척에 있는데, 그래도 1년 동고동락 한 사이에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 까는 너무 하지 않냐며 새해엔 한 달에 한 번은 친구 사무실과 내 작업실 중간즈음에서 만나 점심 회동을 하자 약속을 했고 그 첫 만남을 가졌다. 중간에서 만나니 10분 정도면 만나는 거리였다. 가볍게 점심 먹고 근처 카페에서 여유롭게 차 한잔 했다. 새해 이야기, 일 이야기, 줄어든 머리숱 이야기 이벤트 같은 만남이 아닌 일상 속 만남 안에 담기는 수다는 맥락 없이 평화롭다.
고등학교 때 둘의 공통점이라면 잠이 많다는 거였다. 둘 다 소문난 잠보였는데 친구는 그 와중에도 꼼꼼히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였고, 수업시간 제1열을 항상 지키는 모범생이었고, 나는 좀 설렁설렁, 가능하면 중간과 뒷자리 사이.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 꽤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세상 자유로워 보였다고 하니 좀 억울하긴 하다.
어쨌든 친구는 누구나 '그럴 줄 알았어' 싶게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여전히 겉으로만 자유롭고 실상은 총총거리며 사는 프리랜서 혹은 예술가. 즈음으로 산다. 나는 그녀의 미래를 그때도 어느 정도 예측했는데 그녀가 지금 만나는 나는 그녀의 예측 안에 있었을까. 문득 궁금하다.
# 유난히 화분이 많았던 카페에서 화려함의 극치인 꽃을 발견했다. 만져보고 가까이 보면서도 생화냐 조화냐 의심 갈 만큼 색과 질감이 독특했다. 네이버로 검색하니 아나나스라고 나오는데 주인장은 다른 이름을 이야기해 찾아보니 에크메아 파시아타. 아나나스 과 안에 속하는 식물인듯했다. 꽃말이 '만족'이란다.
이다지도 화려하니 만족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