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스페인] EP 1
8년 만에 스페인을 다녀왔다.
정확히는 스페인 세비야를 다녀왔다.
13년 전 스페인으로 떠날 때도, 그곳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 때도 스페인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은 없던 터라 돌아와서도 꼭 다시 스페인에 갈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도 주지 않은 숙제를 혼자 안고 있는 것처럼 ‘한 번은 더’라는 이상한 의무감 같은 것이 마음 한편 담겨 있었다.
그렇게 좀 즉흥적으로 스페인에 다녀왔다.
혹시 하는 맘에 검색을 했더니 저렴한 항공권이 검색되었고, 한국에 다녀간 스페인 사는 친구가 비어있는 자신의 집에 와 있어도 된다는 고마운 제안도 해 주었다. 마음이 조금 무거운 시기였고, 그래서 분리감, 의식적인 치유행위가 필요하던 때이기도 했다. 한 달이라는 길다면 긴 여행을 할 거면서 준비랄 것이 없었고, 집에 달랑 있는 기내용 캐리어 하나 꾸역꾸역 채워 나섰다.
비행기는 오후였다. 13년 전 스페인을 갈 때는 꼭두새벽 비행기여서 날도 밝지 않은 새벽에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갔었다. 두렵고 설레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던 시간이었다.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의 에너지처럼 매 순간순간 수많은 감정들이 빼곡했던, 넘치는 상상의 시간이 가득했다.
하지만 다시 방문하는 스페인 비행기를 기다리는 나는 어떤 기대감도, 설렘도 없이 텅 비었다. 오후 공항의 차분함처럼 떠나는 길이라기보다는 돌아가는 길처럼 덤덤했다. 혹 그 비어있는 공간에 무언가를 담아 올 수 있을까. 그 정도의 느낌표도 물음표도 없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가 지웠다.
경유지를 지나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였는데 아직 어둑어둑했다. 스페인의 겨울은 해가 이렇게 늦게 떴었던가. 낯선 나라의 어느 도시에 도착해서 다시 다른 도시로 이동하던 긴장감 넘치던 여정은 없었다. 익숙하게 기차역으로 가는 연결 교통수단 중 개인적 기준으로는 가장 간단하고 저렴한 세르까니아(Cerania)를 탔다. 이 연결편은바로 고속기차를 타면 무료로 탑승이 가능하여 역 사무실에서 야무지게 무료 티켓도 챙겼다. 공항에서 역으로 가는 교통편이다 보니 여행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교통편을 탔는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약간의 불안과 긴장이 담긴 표정들 가운데서 여행객도 현지인도 아닌 애매한 모습으로 이제 막 밝아지기 시작한 아침 해를 보며 다시 돌아온 스페인에게 조용히 혼자 인사했다.
8년 만이네.
살 때는 5년이 참 길다고 생각했는데, 떠나와 한국에서 8년을 훌쩍 살았으니 5년 그까짓 시간, 별것 아니었네.
세비야로 가는 기차를 타고서야 이동의 피로감이 한껏 몰려왔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한참을 졸다가 눈을 떠 밖을 바라보다 문득 여기가 어디인가? 싶었다.
‘로하! 기차 탔어?’
한국 KTX에서 일어난 것처럼 비몽사몽 이곳이 어디인가를 잠시 가늠하고 있을 때 마침 세비야 언니 까말라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전히 나를 스페인에서 불리던 이름으로 반갑게 불러주는 벗. 세비야 기차역에 마중을 나와 있을 터였다.
‘나는 세비야에 가는 중이구나.’
머릿속에 이 문장이 떠오르자 스페인에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때와는 다르게 마음이 그제야 좀 흔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