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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하 Dec 09. 2019

'백수'라는 말-nini

 나의 두번째 언어-스페인어로 살다 #2-1

“뭐 하는 사람인가요?”


학교나 직장이라는 기본 틀을 벗어나는 순간 이 질문만큼 어려운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속’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지도 모르겠다. 서류 작성을 할 때 분류에서 편리하게 활용될 수 있는 ‘기타’ 항목은 서면 뿐 아니라 대화에서도 가끔은 필요한 옵션이다.


직장이라는 틀을 벗어나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가서 살아가며 종종 그 ‘기타’항목의 옵션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6개월 정도 어학원을 다닐 때는 ‘공부해’라고 쉽게 대답했었는데 그 틀마저 없어지고 나니 정확히 어떤 동사, 혹은 명사로 나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여행자도 아니고 생활인도 아닌 잠시 멈춰있는 상태를 표현할 가벼운 단어를 찾는 일이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한국의 ‘백수’라는 단어가 스페인어에 있을까 궁금해서 친구에게 물어봤고 그렇게 알게 된 단어가 바로 ‘nini(니니)’였다. 사전적 스페인어는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 농담처럼 가볍게 사용하는 말이라고 했다. 


‘nini니니’는 ‘ni trabajar ni estudiar 니 뜨라바하르 니 에스뚜디아르’의 줄임말로 ‘일도 안하고, 공부도 안 한다’는 말이다. 농담 같이 가벼운 발음상의 느낌도 재미있어 그렇게 진지하게 나를 설명해야할 필요가 없을 때는 종종 사용했었다.

 ‘뭘 하는 사람이냐’를 물었는데 ‘하지 않는다’는 말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범주 안에 없는 ‘기타 등등을 하고 살아가는’  삶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니니’의 삶은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많은 삶이기도 하다는 걸 그 시간을 한번 쯤 지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백수 과로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한국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하며 ‘자기소개’를 배우는 시간에 이 단어를 알려주면 직장인이건 학생이건 모두 ‘니니’라고 스스로를 답하는 것을 좋아한다. 삶에서 한 순간, 시한부 ‘니니’의 호강을 누려보는 것. 하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 해야 할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로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일상에서 실제로 ‘니니’라는 단어가 그렇게 즐겁고 가벼운 것은 아닐 것이다. 스페인에 살 때 내 주변에도 니니들이 참 많았다. 왠지 유럽 친구들은 니니도 행복할 거 같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천유로 세대(우리나라의 88만원 세대와 흡사하다)’라 불리는 스페인의 젊은이들에게도 ‘니니’라는 가벼운 단어 속에 담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너는 뭐하는 사람이니?’라고 물으면 스페인에서 한참을 망설였던 것처럼 답을 찾는데 똑같이 애를 먹을 것이다. 나를 설명하는 단어 하나를 찾아내는 일은 외국어와 모국어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내 삶에 대한 정의’의 문제이기에 그렇다. 언젠가 ‘하지 않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하는’ 나를 담은 단어 하나가 ‘니니’라는 단어에 대체되는 것, 그것이 나를 포함한 수많은 니니들의 바람이 아닐까.


* 더 많은 에피소드는 [나의 두번째 언어-스페인어로 살다]브런치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yspan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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