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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하 Nov 20. 2021

나는 계속하고 있을게

1.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그 웃음에 문득 전염되어 내 마음이 밝아지면 내 밝아진 얼굴에 안심한 인선의 눈이 더 환해졌다

"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주문처럼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한강의 책을 읽다가 유난히 나를 멈추게 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멈추어 읽고 다시 읽고, 그렇게 문득문득 다시 책장을 넘겨 그 부분을 읽었다. 정확히는 이 문장을 읽었다.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소설 속 인선의 그 문장은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여러 변수에 종종거리는 주인공의 불안함과 망설임 걱정의 시간을 안심시켰다. 어떤 시간 안에서도 할 일을 그저 무심히 하는 것. 그런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내 삶의 불안정한 지대가 어느 정도는 균형 잡히는 위안을 주인공은 얻었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 그렇게 고요하게 걸어가는 길 위에 어느 순간 슬쩍 편승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보루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이 문장에 되돌이표를 하며 멈추는 이유는 책 속의 인선을 내 삶의 곁으로 불러와 그 문장을 가까이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2.

경기도 여주에서 작업하시는 한 도예가분을 만나고 왔다. 묵묵히 본인의 작업을 하시는 도예가분이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삼 년째 이어 오고 있는 수원 화성을 흙으로 빚는 작업이었다. 어떤 프로젝트로 하는 것도 아니니 지원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삶이 그렇게 넉넉하지도 않으니 작업의 속도는 천천히 느리게 이어져 가고 있었다. 컨테이너 작업장 한편에 차곡차곡 완성되어가고 있는 화성은 지금까지의 시간도 엄청나지만 과연 어느 시간을 더 쌓아야 완성이 될까 앞으로의 시간도 막연하게 담고 있었다. 그야말로 몇 년이 더 걸릴지, 끝나기는 할지 모르는 미지의 시간 안에 있는 작업이었다. 


“언제까지 작업하실 거예요?”

“나도 모르지. 그냥 계속하는 거지. 내가 이걸 계속하겠구나 라는 마음이 생기면 속도는 중요하지 않지 않나. 그냥 하는 일만 남는 거지.”


도예가는 대학시절 술에 취해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길가 도랑에 빠졌는데 신발이 다 젖었다고 했다. 젖은 신발이 불편하니 얼른 달려서 학교까지 갈까 하다가 그냥 신발과 양말을 벗고 천천히 땅을 조심스레 밟으며 학교로 돌아가셨단다. 15분이면 갈 길이 한 시간도 넘게 걸렸다. 


“길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서두를 필요가 있나. 15분을 뛰어가는 것과 한 시간을 조심조심 발 밑을 살피며 가는 시간 안에 내가 마주하는 느낌은 너무 달라. 그러니 정해진 길을 굳이 달려갈 필요가 있을까.”


매번 전력질주를 하느라 쉽게 지치곤 하는 이유는 어쩌면 여전히 정해지지 않은 길에 대한 불안이 자꾸만 목적지를 빨리 확인하고 돌아올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을까. 15분이 아닌 한 시간을 늘려 그냥 계속 걸어갈 길을 여전히 모르기 때문이겠구나 싶었다. 말로는 느리게 천천히 사는 삶을 꿈꾼다고 하지만 나의 호흡은 여전히 바쁘고 숨이 차다는 걸 도예가가 쌓고 있는 화성 담장 한 켠의 시간을 보며 발견했다.


3.  

“선생님 스페인 작가 ‘요시고’ 이름이 ‘나는 계속한다”라는 뜻이 맞아요? “

스페인어 수업을 듣는 학생이 톡을 보내왔다. 


맞다. 올해 한국에서 전시를 하기도 한 스페인 작가의 활동명은 ‘Yo(나는) + Sigo(계속 나아간다: ‘seguir지속하다, 계속 나아가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의 일인칭 변형)‘이다. 작가의 아버지가 선물한 시에서 인용했다는 문장이다. 


“본인에게 솔직하고 오직 자기 자신의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밀고 나가며 멈추지 않는 것이 

개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겪어야 배울 수 있고 계속 발전합니다.”


전시에서 미래의 사진작가에게 전하는 작가의 말은 그렇게 그의 활동명 안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크게 그의 이름에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최근 ‘지속성’에 대한 몇 단상 때문일까. 학생의 질문과 함께 다시 한번 그의 작품과 인터뷰 이야기들을 찾아 읽고 보게 되었다. 

작가가 사진을 찍기로 결심하며 ‘이제부터 계속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라며 그의 예술 활동을 선언하고 있었던 거구나.

그 선언이 간결하고 멋있었다.


4.

한때는 ‘지속’보다는 ‘변화’에 의미를 두고 살았다. 무언가를 지속하는 일은 다소 게으르고 고리타분하며 심심한 일이라 여겼다. 어떻게든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려 했다. 여행을 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맥락 없는 선택들을 하며 그렇게 삶을 만들어 갔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꽤 ‘변화’라는 키워드 안에서 오랜 시간 잘 놀았다.


요즘은 ‘지속’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조금씩 기울고 있다.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 무엇을 지속할 것인가. 변화의 시간을 모아 이리저리 모자이크 된 시간을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더는 새로운 색깔과 모양을 끼워 맞추어 외형을 바꾸어 가는 것이 아닌, 필요 없는 색과 형태를 덜어내며 계속할 수 있는 형태로, 지속할 수 있는 모습으로  탄탄하고 편안하게 시간을 잘 보듬어야 할 때임을 알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변화에만 익숙했던 나는 그 계속하는 것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인선의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도예가의 “그냥 계속하는 거지”

요시고의 “yo sigo 나는 계속 나아간다”


이 선언들이 부럽다.

어느 날 나 역시 그렇게 간결하고 무심하게 그 한 문장을 삶에서 툭 내뱉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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