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하며 생각한 것
내가 달리기를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봄 운동회 때였다. 한 학년이 고작 열네 명이었던 시골 학교였다. 여학생은 네 명뿐이었다. 처음으로 등수를 매기는 봄 운동회 달리기에서 여학생 네 명은 오롯이 한 조가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그중 꼴찌였다.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그 해 여름, 체육 점수가 유독 안 좋던 통지표에 적힌 선생님의 한 마디가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꼭 해야 하는 숙제 같았던 걸 보면 그때 어린 맘에 자존심이 꽤나 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여름 방학 동안 아침마다 동네를 달렸다.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드디어 가을 운동회가 되었다.
“탕!”
출발 신호와 함께 출발선을 지나 앞도 옆도 보지 않고 달렸다. 고개를 까딱까딱하면, 혹은 고개를 한쪽으로 조금 기울이고 달리면 더 빠르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정말 드라마에나 나올 기적처럼 일등을 했다. 이 정도면 나의 달리기 역사가 바뀌어야 했을 텐데 슬프게도 그렇진 못했다. 운동회 점심시간 의기양양했던 나에게 무심히 엄마가 한 말 때문이었다.
“네가 출발을 좀 빨리 하더라”
학교 다니는 내내 나는 운동회가 싫었고 체육이 제일 싫었다. 그렇게 ‘달리기를 못하는’, 혹은 ‘운동을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달리기가 아닌 다른 운동을 몇 번 배워보기도 했는데 역시 결과는 좋진 않았다. 지레 ‘난 운동을 못하니까’라는 자신감 없음이 걸림돌이 된 것인지 정말 운동엔 소질이 없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지만 결과는 그랬다. 이제는 순위를 다투어 달릴 일이 없고 잘하고 못하고의 평가가 필요한 운동선수도 아닌데 여전히 ‘난 달리기는 못해’는 나를 따라다니는 문장이다.
요즘 다시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는 초등학교 1학년처럼 누구를 이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저녁마다 걷기 운동을 하다가 문득 조금 뛰어보고 싶어 시작했다. 처음에 백 미터 정도를 뛰는데도 다리는 이미 운동장 몇 바퀴를 돈 듯 무거웠다. 그렇게 백 미터씩 늘리며 달리는 거리를 조금씩 늘려보고 있지만 여전히 달리기는 나에게 쉬이 익숙해지진 않는다.
어느 날 문득 달리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나는 지는 달리기를 하고 있구나. 재미있게도 언제나 내가 정해놓은 목표에 잘 도달하지 못하고 이번엔 어디까지라고 목표를 정해놓은 곳이 있으면 참 신기하게 꼭 50미터 정도 앞에서 달리기를 멈춘다. 그리곤 ‘와 거의 왔네.’라며 지는 달리기에 셀프 만족을 한다. 달리기의 ‘거의’라는 타협점은 언제부터인가 삶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하고 있다. 선생님의 통지표 한 줄에 악착같이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던 욕심 많던 어린아이는 없다. 가능하면 덜 무리하는 쪽으로, 너무 집착하지 않는 쪽으로 그렇게 ‘거의’의 지점에서 멈추는 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이기는 달리기를 하려고 다시 조금 더 이를 악물어야 할까.라는 뜬금없는 삶의 자세에 대한 반성이 달리기를 하다가 불쑥 물음표로 다가왔다.
그러다 물음표에 대한 답을 잠시 뒤로 미룬다. 그냥 계속 달리고 싶어지는 마음이면 될 일이다. 달리기 위해 나에게 지는 달리기가 필요하다면 지고, 이기는 마음이 필요하다면 이기면 될 일이다. 그 안에 정답은 없다. 지금 나를 계속 달리게 하는 것은 ‘지는 달리기’에 있다. 조금 여유롭게 멈추는 것. 조금만 더의 악착을 장착하지 않는 것. 그것으로 달린다. 혹은 살아간다. 그런 시간이 어느 날 ‘조금만 더’를 자연스럽게 넘어서게 할 것이다. 많이는 아니지만 나의 목표지점 역시 조금씩 늘어나고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비록 50미터 앞에 멈추어도 그건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아간 지점이니까 말이다.
계속 달린다면 항상 지는 달리기는 없다. 그건 항상 이기는 달리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