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하 Mar 18. 2021

당신에게 스위트 하우스란?

내가 살았던 집들

거의 10년 만에 독립할 집을 구했다. 스페인에서 돌아와 잠시 언니네에 머물러야지 했던 것이 5년이 훌쩍 지났고, 그 사이 독립대신 작업실을 구해 살았는데, 언니의 시골살이 준비와 함께 나도 자연스럽게 독립을 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과 자취생활을 했던 터라 나에게 이사와 독립이 크게 낯설진 않지만 오랜만에 집을 구해보니, 집을 구하는 일은 시간을 지나 참 많이 바뀌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고 3이 되던 해 공부를 해보겠다고(왜 자취를 해야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친구랑 같이 지낸 집은 조르륵 방들이 있는 학교 앞 자취집이었다. 연탄보일러였는데 그 나이에 겨울에 연탄을 갈았다. 옆방들에 다른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가끔 서로의 연탄불 관리를 해주기도 했다. 

대학 입학을 하고 이미 서울에 있던 언니와 함께 살던 집은 방 한 칸에 거실 주방이 있는 반지하였다. 전세 천만 원이라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격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결코 저렴한 돈은 아니었다. 부모님 말에 의하면 그때 가진 목돈의 전부였다고 했다. 대체적으로 집은 괜찮았지만 반지하라는 특성상 여름 장마철이면 물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도 꽤 잘 그곳에 살았다. 

합정역 서교동 언니의 친구네 2층에 공짜로 임시로 살기도 했다. 곧 재건축을 위해 비워둔 집이었고 방이 3개였는데 우리 자매랑 부산에서 올라온 자매, 그리고 역시 부산에서 온 여학생 한 명이 2층에 같이 살았다. 당시 합정역 근처는 지금처럼 번화하지 않은 주택가였던 곳이라 항상 홍대입구까지 걸어 나가서 놀았다. 그곳에 6개월 정도 살았던 덕에 한창 인디문화가 가득하던 홍대에서 그 멋을 알아갈 수 있었다. 그때 한 지붕 아래 살던 친구들은 어떻게 지낼까. 다들 그 후 서울 살이 들이 괜찮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관악구에 들어왔다. 방 두 칸짜리 반지하지만 1층에 가까운 곳이었는데 해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언니의 친구가 같이 한동안 살아서 지금은 구조가 잘 생각나지도 않는데 꽤 좁았던 그곳에 그렇게 세 여자가 복닥복닥 살았다. 난곡 버스의 종점 마을, 바로 옆으로 연말이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산동네가 이어지는 곳이었다. 남들은 교통이 좋지 않다고 했지만 당시 여의도 출근을 하는 나에게는 그곳 종점에서 여의도 종점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편리했다. 종점이니 항상 앉아갈 수 있었고 버스 뒷자리에서 한숨 자면 여의도에 도착해 있었다. 통근버스인 셈이었다.


난곡 산동네 재개발이 확정되고 그렇게 다시 이사한 집은 그 보다는 조금 아랫동네였지만 조금 더 언덕을 올라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1.5층. 처음으로 지상 생활을 하게 되었다. 거실에 있으면 해가 꽤 잘 드는 곳이어서 한낮에 거실에 누워 햇살을 받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웠다. 그동안 살았던 집에 비하면 가장 상태가 양호했다. 직장생활을 몇 년 했던 때라 조금 더 여유가 있어 나름 책상과 침대도 넣고 살았다. 

이 집과의 인연은 주인집 아들이 집으로 들어오기로 하는 바람에 몇 년 만에 끝났다. 그렇게 다시 구한 집은 그 집보다 조금 더 언덕 위로 올라가야 했다. 언덕 꼭대기여서 사람들이 잘 안 얻으려 한다는 집이었는데 집을 보러 간 날 베란다 창에서 보이는 뷰가 너무 멋져서 그냥 계약을 했다. 다가구주택만 살다가 처음으로 살아보는 빌라였고, 안방 베란다가 넓고 바로 뒤에 산이 있는 곳이었다. 그 집에는 종종 방이 필요한 지인들이 한 달씩, 두 달씩 잠시 머물다 가기도 했고, 언니가 결혼하고는 그곳에서 혼자 살았다. 

스페인에 가며 그 집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아는 지인에게 세를 주고 짐을 조금 남겨두었었다. 그렇게 집을 빌려 살던 친구가 두 번 바뀌고 집이 비게 되었을 때 잠깐 한국에 들어와 집을 빼기로 맘먹고 오랜만에 집을 찾아가는데 언덕길이 어찌나 가파르고 높은지 어떻게 그곳을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며 출퇴근을 했나 싶었다. ‘뷰가 좋다니’, 참 낭만적이기도 했구나. 싶었다.

그렇게 서울의 내 집은 없어졌다.


초유의 전세대란이 난 시기에 전셋집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예전에는 부동산 몇 번 돌면 쉬이 알맞은 집을 구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일일이 부동산 품팔이를 하는 것보다 인터넷 홈을 이용하는 것이 더 보편적이 되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상상 이상으로 올랐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던 집 구하기는 거의 포기하고 있던 3월 첫 주에 계약서를 쓰고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서울 가운데 나의 독립공간을 얻었다. 

새로운 집은 오래된 다가구주택의 1.5층, 평수는 작지만 방 두 개에 작은 주방 겸 거실이 있는 집이다. 역세권이 아니고 마을버스가 닿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공방에서 걸어서 20분 남짓 걸려 적당하다. 도배를 새로 하고 장판을 깔면 그럭저럭 혼자 생활하기에 넉넉한 공간이다.  


독립생활을 하며 나는 한 번도 내가 어떤 집에 살기 때문에 나의 경제 수준이 어떻다느니, 내 삶이 어떻다느니, 그것이 타인의 무엇과 비교가 될 일이라거니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반지하건 언덕 위의 집이건 딱 그 당시 나에게 적당하고 편리한 집이었기에 집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집은 그런 것이 아니었나.


요즘 부동산 이야기를 들으면 ‘집’이라는 단어가 담는 의미가 참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어쩌면 이미 그러했는데 내가 미처 인식을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전에도 지금도 집은 ‘평화로이 머물고 쉬는 곳’ 그 이상과 이하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공간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가스 풀풀마시며 연탄불 갈던 기억, 친구들과 같이 여행에서 돌아온 새벽 밤 김치찌개를 먹던 기억, 첫 고양이 보리와의 추억, 베란다 너머 바라보던 멀미 나던 일몰의 기억, 취한 밤 높은 언덕길을 오르며 속으로 열 번은 더 툴툴대던 기억.

그렇게 나의 집들은 나의 시간과 함께 이야기를 남겼다. 새로운 공간은 또 어떤 나의 시간을 함께 써줄까. 집과 나와의 관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동그라미 몇 개보다는 여전히 나에게는 유효하다. 

너무 낭만적이라고? 그냥 그렇게 산다. 


'비우기'(서유영 작)


매거진의 이전글 '소이'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